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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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연 이틀동안 TV에선 순수한 감동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30여년간. 헤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만나 몸부림치며 우는 모습은 제 3자가 보아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이었다.
KBS-TV가 벌인 「이산가족 찾아주기」 프로그램은 우리 민족만이 경험한 고난의 과거를 회상시킨다.
바로 식민지 치하와 6·25 남침을 통해 가족이 흩어진 쓰라린 경험이다.
찾는 사람과 흩어진 사연을 적은 종이를 들고 선 사람들은 벌써 눈망울이 붉어진다. 어버이가 자식을, 자식이 어버이를 찾는 피의 부름은 이처럼 진솔하다.
「피난민 수용소에서」, 「고아원에서」, 「피난길에서」, 「기차에 먼저 태워 보내고」, 「미군지프가 태우고 간뒤」. 거기 더하여 「징용갔다 돌아오니」도 있다. 통곡의 상봉 못지않게 흩어진 사연도 드러매틱하다.
바로 우리가 겪은 전란의 참고를 증거한다.
또 흩어진 지명도 이제는 잃어버린 땅의 이름이다. 「평양 선?리」 「?진반도」 「?백」 「흥남」등. 지금은 언제 가볼지 모를 아득한 곳이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오늘처럼 사람간의 교류가 왕성한 때에 30∼40년간을 서로 찾지 못하다니.
아마 이런 일은 한국땅에서나 있을 것 같다. 지금 전국은 일일생활권, 거기다 해마다 10억통 이상의 편지가 교환되고 전화만도 3백여만대, 매스 미디어마다 광고의 홍수를 이루는데도 혈육간의 만남은 이 처럼 힘들다.
그만큼 우리의 수난은 가혹했다. 6·25 다음날 서울시민들은 소달구지에 피난 짐을 싣고 내려오는 개풍, 장단, 포천, 가평군민을 목격했다. 가족이산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날 서울시민도 남부여대로 남행길에 올랐다. 더욱 쓰라린 기억은 1·4후퇴. 2백여만명의 북한 주민과 . 한데 어울려 눈발을 헤지고 남으로 몰렸다.
보다 기막힌 것이 3·8선. 지금은 휴전선으로 양단된 남북 이산가족의 비극이다.
이래저래 헤어진 가족은 1천만명을 넘는다. 우리 국민 모두가 직접, 간접으로 이산가족이다.
1971년 8월12일 대한적십자사는 남북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북에 제의했다. 몇차례 적십자회담이 서울, 평기, 판문점을 오가며 열렸다. 그러나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북한의 속셈 때문에 회담은 깨지고 이제 북은 대화조차 거부하는 상태.
이제는 남녘 땅에나마 사는 이산가족이라도 찾아야 할때다. 가족을 찾는 과정 자체가 민족의 공감대와 일체감을 형성한다. 언젠가는 이 공감대가 북쪽까지 메아리질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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