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이승만 대통령|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33년만에 처음 공개하다.|「딘」소장 생존여부 몰라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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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피난생왈도 어느덧 한달이 다가온다. 이곳 대구에서 누구보다 고생을 하는 사람은 조 지사부인이다. 대통령부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의 신세를 지고있다.
대통령 임시관저에는 항상 70여명의 고정식구가 북적거렸다. 이 모두가 조 지사부인의 일거리다. 우리부부·각료·국회의원비서관·경호경찰, 수시로 드나드는 군장성·미 대사관직원들,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져 이 곳에 내려온 정부관리들 모두가 조 지사관저의 식객들이었다.
부인은 가정부 2명을 데리고 임시경무대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밥짓는 일에서 빨래까지 그만한 중노동도 없었다.

<우리 날계란 듭시다>
대통령은 양복보다는 모시남방을 좋아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모시옷을 다룰줄 볼랐다. 다듬이질에서 풀먹이는 일, 다림질을 조 지사부인이 매일같이 해냈다. 70여명의 세끼 밥짓는 일도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조 지사부인은 과로에 유산까지 하게되었다. 얼굴이며 팔다리가 퉁퉁 부었는데도 몸조리 조차 못하고 일에 매달려야했다.
대통령은 나에게 계란을 날로 먹자고 했다. 반숙이나 프라이를 하게되면 그만큼 조 지사부인의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대통령이 계란을 날로 먹으면 밑의 사람들도 따라서 그렇게 할 것이고 지사부인의 일감이 훨씬 줄어든다는 아이디어였다.
대구에는 사과와 토마토가 흔했다. 우리부부는 아침식사로 사과와 토마토에 날계란 2개씩을 먹기 시작했다. 모시옷에도 풀을 먹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의 눈치를 채지 못한채 전과 같은 식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신국방장관은 어김없이 상오 5시반이면 나타나 꼭 반숙을 요구했다.

<장관 모시기 힘들다>
지사 부인은 『대통령 모시기는 쉬운데 다른 장관님들이 더 힘들다』며 웃을때도 있었다.
대통령은 매끼의 반찬을 3가지로 제한했다. 임시 경무대의 살림형편도 어려웠지만 지사부인의 일손을 어떻게든 덜어 주겠다는 속셈이 컸다.
피난길엔 너나 없이 단벌신사들이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고위관리고간에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아끼려고 지사관저에 들어오면 팬츠만 입고 웃옷은 옷걸이에 모셔놓았다. 그러다가 회의가 있거나 외국손님이 올때면 옷을 챙겨 입고 나타나곤 했다. 당시 지사관저에는 「헬렌·김」(김활난 박사)이나 임영신 박사같은 여류인사들도 무시로 드나들었지만 각료들의 팬츠차림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간혹 서울에서 비참한 소식이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두고 온 가족생각에 모두들 팬츠차림으로 둘러앉아 엉엉 우는게 보롱이었다.
그런 고생속에서도 지사부인은 괴로운 표정 한번 짓지 않았다. 정말 훌륭한 부인이었다. 우리 대통령부부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고마운 분이었다.
아직도 「딘」장군에 관한 소식은 없다. 대통령은 몹시 걱정을 하며 군과 경찰에 대해 그의 생존여부라도 빨리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미 군사령부는 대전에서 안동으로 이동하는 한국군은 트럭을 이용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 김석원 장군이 반발, 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산길이 너무 험준한데다 매복한 적군에게 노출 될 경우 꼼짝없이 갇혀 많은 희생자를 내게된다며 그런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신국방은 미 사령부에 이 같은 사실을 롱고하자 그들도 김 장군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 기차를 내주었다.
신 장관은 한국부대가 안동에 무사히 배치됐다는 보고를 하며 「워커」장군과, 마침내 미군부대에 한국군을 배속시켜 전선에 함께 투입하는 문제에 합의를 보았다고 알렸다.
전쟁초기부터 우리가 주장했던 문제가 이제야 해결된 것이다. 당시 미군부대에 배속됐던 한국군은 바로 카투사제도의 시작이 된 셈이다.
대통령은 미국현지에서 발표하도록 짧은 성명서를 장면대사에게 보냈다. 내용은 한국군에 무기와 탄약이 필요하다는 호소였다.
이 자리에 있던 신 국방은 그 같은 성명서를 보내는데 반대했다. 그 이유는 미국의 후속부대가 속속 도착하고 있는 판에 미국에 대고 자꾸 총을 달라는 것은 자칫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싸우는걸 우리가 원치 않는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였다. 우리가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살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우리 젊은이들이 싸우겠다는 의지는 강하지만 미국이 싸울 수 있는 무기를 대주지 않기 때문이고 결국 우리도 피를 흘린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생명을 하나라도 더 보호하겠다는 뜻 아닌가』하며 성명서 내용을 동경으로 타전하라고 지시했다.

<전면공격 이틀 늦춰>
그때 행방불명됐던 「딘」소장이 40여대의 트럭에 탄 미군패잔병과 함께 고창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곧이어 김천에서도 그를 보았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우리 모두가 안도와 기쁨에 사로 잡혔지만 잠시후 이 정보는 모두가 『신빙성 없는 것으로 취소한다』는 속보에 또다시 침울해지고 말았다. 우리와 함께 있던 「무초」대사와 「워커」장군도 즉각 이 정보가 잘못된 것임을 확인했다 (「딘」소장은 7월20일 행방불명되어 8월26일 전북 진안에서 북괴군에 포로가 되었다).
23일 아침 전날의 종합상황보고자리에서 국방장관은 전체적으로 전황이 밝지 못하다고 했다. 원래 전면공격은 일요일로 계획되었으나 태풍때문에 이틀이 지연될 것이라고 했다.
남원에 포진한 미 해병대는 적의 탱크를 저지할 무기가 없어 고전하고있다는 보고다. 미대사관은 「드럼라이트」참사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직원이 부산으로 떠났다. 연락용 지프 몇대만을 남겨놓고 차량과 집기들도 부산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무엇을 예고하는 징조일까?
대통령과 나는 「무초」대사가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오는 시간전에 교회를 다녀오기로 했다. 교회는 초만원이었다. 두분 목사는 차례로 『하느님은 언제고 정의의 편에 서신다』며 자유와 정의를 위해 피를 흘리는 이 땅의 젊은이와 우방군을 하느님의 은혜로 보살펴 달라고 기도했다. 설교가 끝나고 대통령은 15분간 교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자』고 위로했다.

<광주 피점 극구부인>
이날오후 이범석 장군은 광주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보고했지만 신 국방은 이를 부인하고 광주에서는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고 했다. 신 장관은 이어 미군은 지금 어느 지점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남강에서 낙동강까지 방어벽을 쌓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딘」장군과 함께 있던 「지미·김」(「프」여사는 괄호안에 「who?」라는 표시를 해놓았다) 이 부상을 당해 병원에 후송되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미·김」은 공산군이 대전을 점령했을 때 「딘」소장은 사단사령부에 있었고 사단사령부가 포위 됐을때 장군의 부하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은채 자기와 「언더우드」박사 아들만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타고있던 자동차가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고 함께 있던 「언더우드」박사 아들도 다친 것 같다고 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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