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6) 제79화 육사졸업생들-육사공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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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유격대의 창동 습격후 정보원들을 통해 수집한 첩보에 따르면 적은 창동 수송대를 폐쇄했다는 것이었다.
대단한 전과는 아니었지만 유격대원들은 일시나마 적에 충격을 주었고 전력에 차질을 빚게 했던 것이다.
다음 공격목표는 의용군훈련소가 돼버린 육사였다.
유격대는 미드 엘리트의 요람인 모교가 적의 병력양성소로 이용된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육사 기습에는 유격대원 전원이 참가하기로 하고 총공격 계획을 세웠다.
김동원생도가 주공격조를 이끌고 육사교도대를 습격하고, 조영달생도는 태능역 방면으로 공격, 내무반과 취사장을 파괴하며, 박금천생도는 본관 맞은편에서 기관총으로 교란사격을 가해 주공격조와 조영달팀의 활동을 돕기로 했다.
일동은 눈을 감고도 그릴수 있는 육사 일대의 지형과 시설물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밤잠을 설쳤다.
8월15일 하오 6시. 유격대원 전원이 불암사 뒤뜰에 모였다.
김동원생도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공격을 앞두고 동료들 앞에 서서『우리는 지금까지 50여일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용감히 살아왔다. 지금 육사에는 우리의 형제들이 강제로 끌려와 적의 총알받이로 희생되어 가고 있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군인으로서 후회 없는 최후를 장식하자』고 말했다.
김동원생도가 목이 메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하는 사이에 여기저기서 대원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윤주지는 생도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윤주지와 악수를 나눈 생도들은 불암사를 출발했다. 잠시후 뒤를 돌아보니 윤주지는 합장하며 생도들의 무운을 빌고 있었다.
불암산 입구에서 김동원생도조는 철로를 건너 갈매리를 거쳐 새고개 목으로 진입했으며, 조영달생도조는 삼육학교 앞을 지나 논두렁을 타고 모교 중강당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포진했다. 박금천생도조는 저수지옆을 돌아 학교정문앞 언덕에 올라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공격개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격개시 시간은 밤11시30분이었다. 드디어 교도대 좌측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화염병과 수류탄이 터지면서 교도대 건물에 불이 붙었다. 이번에는 취사장 쪽에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고 동시에 학교 정문앞 언덕에서는 기관총이 학교본부 건물을 사정없이 갈겼다.
자다가 뛰쳐나온 적병들은 고함을 치며 미친듯이 뛰다가 푹푹 쓰러지는 것이 불길속에 환히 보였다. 약20∼30분이 지났다. 총소리가 멎고 소화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유격대원들은 발길을 불암산대신 수락산 내원암으로 향했다. 이는 유격대원들이 불암산을 내려오면서 이번 기습 후에는 분명히 불암사가 적의 수색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 공격후의 집결지를 반공인사들이 은신해 있던 수락산 내원암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퇴계원보급소 기습때 다리에 총상을 입은 한효준생도를 미리 그곳에 보내 두었었다.
16일 새벽5시30분께 내원암에 도착했다. 인원점검을 해보니 유격대장 김동원생도와 전희택·홍명집생도가 보이지 않았다.
꽃다운 나이에 임관도 못하고 모두 산화한 것이었다. 평안도출신인 김동원생도는 평양이중에 재학중 반공학생운동의 선봉역할을 하다가 쫓기는 몸이 되어 월남해 육사생도1기로 들어왔으며 황해도출신인 홍명집생도는성품이 온순하고 자상한데가 많아「홍마담」으로 통했다고 한다.
전희택생도는 충청도 사나이로 도대체 말이 없었는데, 얼굴에 털이 많아 변장하면 30살도 넘게 보여 재학시절 매일 면도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유격대의 육사기습으로 적은 50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곳에 끌려와 있던 많은 의용군들이 혼란한 틈을 타 도망쳤다고 한다.
적은 예상했던 대로 불암산 일대를 수색했으나 아무 단서도 잡지 못하자 윤주지만 연행해 갔다고 한다. 윤주지의 행방은 그 이후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유격대원들은 내원암에 머무르는 동안 아군의 인천상륙소식을 전해들었으며, 9월22일에는 패주하던 적이 인근 농민 1백여명을 강제 동원해 짐을 지워 끌고 간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유격전을 벌어다가 박금천·한효준·이장관 등이 또 희생됐다. 결국 유격대원중 조영달생도와 강원기생도만 부상한 몸으로 9·28수복때 아군에 구출돼 부산육군병원으로 후송됐으나 그때입은 상처 때문에 고생하다 결국 숨지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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