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4)<제79화 육사졸업생들>(197)장창국|불암산 유격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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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전으로 철수한 생도대가 원동국민학교에서 임관준비를 하며 잠깐 휴식을 춰하고 있을 무렵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생도들은 유격대를 조직, 여기저기서 인민군의 허를 찌르거나 적의 보급소와 의용군 수용소를 기습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불암산 유격대다. 불암산 중턱에는 불암사라는 절이 있었다. 28일 밤 불암사에는 10여명의 생도1기들이 몰려왔다. 한강 인도교와 광진교가 폭파된후 팔당이나 광나루 쪽으로 도강을 시도했다가 낙오되었거나 후퇴를 거부한 생도들이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불암사에서 만난 생도들은 김동원 전희택 홍명집 박인기 김봉교 박금천 이장관 조영달 한효준 양원기등이었다.
불암사와 생도1기들의 인연은 1년전, 그러니까 49년10월 어느 일요일에 맺어졌다고 한다.
당시 불암사에는 윤용문이라는 주지스님이 계셨다.
학교측이 일요일 외출을 금지시킨데 대해 어느 생도가 불평을 털어놓았다가 생도들은 불암산 정상까지 갔다오는 단체기합을 받게 되었다.
불암산 정상을 돌아 내려오던 생도들은 물을 마시려 불암사에 들렀다. 이때 자혜심 깊은 윤주지는 냉수에 꿀 한숟갈씩을 타서 생도들에게 주었다. 그후 생도들은 휴일이면 곧잘 불암사를 찾았고 윤주지는 생도들을 따뜻이 맞아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곤 했다는 것이다.
윤주지는 지친 모습으로 M1소총을 메고 불암사를 찾은 생도들에게 더운 밥을 지어 대접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28일밤을 절에서 보낸 생도들은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김동원·박금천생도가 유격대를 조직하자는 의견을 내놓자 전원이 이에 동의하고 나섰다.
1일 새벽에는 낙오된 9연대 장병 7명과 생도 2기생 3명이 다시 불암사를 찾아 왔다.
이들은 김동원생도를 유격대장으로, 박금천생도를 대장 보좌관으로 뽑았다. 그리고 제1조장에 조영달생도를, 제2조장에 박인기생도를 임명하는등 유격대 조직을 자연스럽게 마쳤다고한다. 윤주지는 생도유격대가 정보원으로 이용하도록 불암산 아랫마을에 사는 독실한 신도5명을 추천해 주었다.
1일 하룻동안 생도들은 불암사를 중심으로 20∼30m 간격으로 자신들이 은신할 호를 파고 나뭇가지로 교묘히 위장했다.
대원들이 갖고 있는 무기는 M1소총 15정, 카빈 3정, 기관단총 2정, 경기관총 1정, 수류탄 50발과 각종실탄 3천여발 등이었다.
유격대원들이 불암산에 들어간지 1주일이 지났을 무렵 윤주지와 민간인 정보원들이 동네에 내려가 수집해온 정보를 분석해본 결과 모교인 육사는 의용군 훈련소로 둔갑해 있었고, 퇴계원에는 적의 간이보급소가 설치돼 병참물자를 야적해 놓았으며 창동국민학교에는 적수송대가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또 그들이 숨어있는 불암사에서 8km 떨어진 수락산에도 국군 낙오병과 인근 동네에서 입산한 반공인사 10여명이 은신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드 생도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것은 미군이 이미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였다.
김동원유격대장은 퇴계원 보급소를 유격대의 첫 공격목표로 결정, 대원들을 내보내 지형정찰을 시켰다.
보급소 주변은 울참한 포플러 숲으로 둘러싸여 아군의 공중정찰에도 쉽게 발각되지않는 장소였다. 보급소 앞쪽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경춘선철도가 통과하고 있었다. 보급소 주변에는 철조망을 쳐놓았으며 적의 상주 경계병력은 1백여명 정도였다.
김동원유격대장은 유격대를 주력조와 지원조로 편성, 주력조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 보급소 동쪽을 공격하고 지원조는 철길쪽으로 올라서서 보급소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물론 동기생들과의 충분한 의견교환끝에 얻어낸 작전이었다. 작전D데이는 10일 밤9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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