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의지의 「대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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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본명 「마거리트·힐더·로버츠」. 1925년 식료품상의 둘째 딸로 출생. 옥스퍼드대화학과 졸업. 졸업 후 잠시 플래스틱 제조회사에 취직. 51년보수당후보로 출마했다 낙선. 그 해 조그마한 개인회사 소유주인「대니스·대처」와 결혼.
결혼 2년 후 쌍동이 출산. 출산 4개월 후 변호사시험합격. 변호사개업. 79년 선거에 당선. 70년 문교장관. 75년 보수당당수. 79년 영국사상 최초의 여수상. 83년 6월 보수당 압승으로 수상연임.
이상은 「대처」수상의 이력서 줄거리다.
그녀는 4개월짜리 쌍동이를 키우면서 변호사 자격시험을 볼 때 친구에게 『이것은 나의 의지와의 싸움』 이라고 말했었다.
「윌슨」전수상은 「대처」여사를 평해 『그녀는 자신의 용기 때문에 앞으로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그녀의 용기와 의지는 「히드」전수상에게 도전, 당수를 차지한데서, 또 8천마일의 먼거리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결연히 나서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여실히 나타났다.
반 인플레정책도 좋은 예다. 실업자가 많은 것은 정치가로서는 제일 금기사항. 그래서 인플레시책을 써서라도 실업자를 줄이려고 하는 것이 상례적인 포석. 그러나 「대처」는 그렇지 않았다.
실업자가 3백만명을 넘고 실업률이 선진국에서는 가장높은 13·5%. 그래서 야당은 물론 여당안에서도 아우성이 높은데도 「대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실업문세는 돈을 풀어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물가를 낮추고 생산성을 높여 좋은 물건을 만들고 수출을 많이 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대처」는 또 노동조합의 잦은 파업소동에도 정면으로 맞섰다.
이른바「영국병」을 고치지 않고는 영국의 장래는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그결과로 물가는 4%로 내려 앉았고 노조 스트라이크도 격감했다.
만4년의 집권과 유례없는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영국국민들이 「대처」에게 압도적 승리를 안겨준 것은 「대처」의 용기와 성실한 자세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앞으로 5년동안 다우닝가 10번지를 차지하게된 「대처」가 계속 오늘의 지지와 인기를 유지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에 심취했기도 한「대처」여사는 과감하게 자유시장경제정책을 펴나갈 것이고 대외정책에서는 미국 및 EEC와 협력관계를 다지면서 대소 강경노선을 걸어나 갈 것으로 보인다. <이제훈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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