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부탁/원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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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일요일 아침,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일어난 우리 집 두 아이가 무엇인가 의논을 하고 분주히 오가고 하더니 일찌감치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했다. 웬일일까? 아침 밥도 먹기 전인데.
살그머니 그들 곁으로 다가가 말참견을 했더니 11시쯤 집 뒤쪽에 있는 산으로 놀러가기로 여러 친구들과 약속을 했다는 것. 계획이 자못 볼만했다. 점심 도시락은 물론 고무풍선이랑 색연필과 도화지, 집에 있는 악기 몇가지도 동원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산에 가기 전에 공부하기로 했다는 겻이다.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주고 물과 약간의 간식을 챙겨주면서 나는 이런저런 당부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데에서 놀아라, 너희들 보다 큰 애들이 와서 짓궂게 굴면 상대하지 말고 곧 내려오너라…등등.
며칠 전, 딸애가 옆구리를 움켜 쥐고 흙투성이가 되어 울면서 들어왔다. 바로 집앞 골목에서 제 또래 (국민학교 3학년)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중학교정도의 남학생 하나가 오더니 자기도 끼어 달라고 했다는 것. 그래서 몇마디 딸애가 대꾸를 했나본데 그 남학생이 발로 옆구리를 차더라는 것이다.
우리 동네는 서울이지만 산이 있고, 나무가 있어 공기가 맑으며 새들이 깃을 치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시내에서 교통이 좀 멀고 집값의 변동이 별로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약삭빠른 어른들은 학군이 좋은 곳으로, 살기가 매우 편리하다는 아파트로, 또 투기를 위해서라도 구석진 이동네를 재빨리 뜨는 것이다.
한 곳에 정착을 못하는 어른들의 그 약사빠름이 행여 아이들에게 난폭한 성품을 길러주는 한 요소가 되는 건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 딸애를 발로 찼던 그 남학생도 알고 보니 이사온지 며칠안되는 집의 아이였다.
뜰 앞에 장미가 곱게 피어나고, 뻐꾹새 소리 바람에 실려 선명하게 들려온다. 이 좋은 날을 맞아 소풍을 나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는 금지·제재·조심 등의 사항만 잔뜩 실은 슬픈 부탁만을 되뇌야하다니…. <서울강서구화곡동29의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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