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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이돈태의 촌놈 정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월 14일 오후 2시, 경제편집 데스크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영국 디자인 회사 탠저린의 이돈태 공동대표 사진 있지?”

“있기는 있는데 ….”

“이 대표가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글로벌디자인팀장으로 영입되었어. 내일 경제 1면에 기사가 게재될 계획이야. 멀쩡한(?) 사진 몇 장 보내줘 얼른.”

“멀쩡한 사진?, 일단 찾아보고 연락드리죠.”

분명 ‘멀쩡한 사진’을 요구했다. 이렇게 똑 부러지게 요구를 한다는 것은 멀쩡하지 않은 사진을 이미 봤다는 뜻이다.
예전에 그의 사진을 찍은 건 맞다. 그런데 멀쩡한 사진을 찍었을까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일단 지난 파일을 뒤져봐야 알 수 있다. 다른 일을 하다말고 사무실로 달려와야 했다. 멀쩡한 사진이 없으면 낭패다.
없다면 적어도 편집자가 대안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하니 시간을 다퉈 확인해야 했다.

2013년 봄, 미술담당 기자가 탠저린 이돈태 대표 ‘불-완벽 초상화’를 한번 찍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시 일요일 신문 ‘중앙SUNDAY’에 연재하던 인물 시리즈였다. 이 초상화 시리즈는 사실 사진을 멀쩡하게 찍지 않는 프로젝트였다. 인물들의 콤플렉스, 트라우마, 장애를 드러내는 불편한 사진이 태반이었다.)

“탠저린은 뭐고 또 이돈태 대표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탠저린은 아이폰 디자인을 주도한 조너선 아이브 애플 디자인 총괄(수석부사장)이 만든 회사예요.

세계적인 창작 디자인 회사죠. 그 회사의 공동 대표가 바로 이돈태씨 입니다.
탠저린에 인턴으로 입사하여 별다른 배경 없이 성실함과 실력으로 대표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에요.
그의 대표작이 2000년 영국항공(브리티시에어웨이) 비즈니스석 디자인인데요.
좌석을 S자 형태로 마주 보게 디자인하여 영국 최고 권위 디자인상인 IDEA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살아 온 이력도 범상치 않으니 ‘불-완벽 초상화’를 찍지 않으면 후회하실 겁니다.”라는 설명에 솔깃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바로 취재 약속을 잡아달라고 했다.

이리하여 그가 스튜디오로 찾아왔다.

“험악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사진 일 수도 있는 데도 거부하지 않고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미리 다른 분들 사진을 보고 왔습니다.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 같습니다”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콤플렉스나 트라우마, 남다른 아픔 이런 것들을 얘기해주셔야 사진 주제를 잡습니다.”

초면에 속내를 열기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준다.

“어린 시절 전기도 없는 강원도 산골에서 문명과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비로소 전기가 들어오고 TV를 볼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가서야 에스컬레이트를 처음 봤으니까요. 그 때 본 에스컬레이트,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촌놈이었습니다.”

“최첨단 산업 디자인 분야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문화의 불모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놈이라는 이야기가 재미있는데요. 그렇다면 문화적 열등감은 없었나요?”

“문화적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100M 달리기를 50M쯤 뒤에서 출발 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러니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골 오지와 최첨단 산업의 경험 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넓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산골 경험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관점을 보게 합니다. 이를 테면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최첨단 디자인에 도입하는 것이죠. 이젠 이 ‘촌놈’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콘셉트는 정해 졌습니다. 바로 ‘촌놈’입니다. 가장 촌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억지로 촌놈을 표현하는 일, 쉬울 리 없다. 멀쩡한 사람이 멀쩡하지 않은 사진을 찍는 일인데 오죽하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음으로 그 높이를 이룰 수 있다(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사마천의 『사기』 이사열전)’는 그의 좌우명이 몸에 밴 탓일까?
멀쩡하지 않은 사진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다.

파일을 찾기 위해 사무실로 달려오며 노심초사했던 이유가 멀쩡하지 않은 사진을 위해 서로 애쓴 기억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게 중 멀쩡한 사진 몇 장을 골라 겨우 마감을 했다.

중앙일보 1월 15일 경제 1면, ‘삼성, 이돈태 영입 … 애플과 디자인전쟁 승부수’라는 제목의 기사에 게재된 사진이 그나마 멀쩡한 것 중 하나다.

권혁재 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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