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스위스 치즈 모델로 안전의식 높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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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문서
서울대 교수·건축학

희망찬 새해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중한 생명들을 앗아간 대형 화재 사고들이 연달아 발생하며,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영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리즌이 주장한 스위스 치즈 모델은 이러한 사고들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구멍이 불규칙하게 뚫려 있는 치즈 조각들을 일렬로 정렬한 뒤 구멍을 통해 나열된 치즈들을 관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낱개의 치즈 조각에 만들어진 구멍들이 비슷한 위치에 배열되어야만 관통할 수 있듯이 안전 사고 또한 치즈 구멍과 같이 다양한 위험 요인들이 우연치 않게 동시에 일어날 때 발생한다. 즉,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보자. 주부의 부주의로 가스 불 위에서 오랜 시간 과열된 냄비를 마침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이 발견하거나, 옆집에서 타는 냄새를 맡고 관리실에 신고해 외부 가스 밸브를 잠그면 화재를 피할 수 있다. 혹은 주방의 연기감지기를 통해 작동된 스프링클러가 화재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과 타는 냄새를 맡은 이웃 주민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연기감지기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는 곧 재앙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치즈 모델은 두 가지의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위의 예에서 봤듯이 나의 부주의가 겹겹이 쌓여 있는 치즈들 즉, 안전 장치로 인해 사고가 나지 않았던 경험에 대한 학습을 하게 되고, 그것이 안전불감증을 키운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첨단의 안전 시스템도 인간의 안전의식보다 우선할 순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일련의 안전 사고들은 국민 안전의식의 토양이 될 것이고, 국민 모두가 이를 계기로 더욱 안전의식 함양에 힘써야 한다.

 둘째, 사회 전반에 걸쳐 보다 확고한 안전 장치(치즈)를 확보해야 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국내에서는 총 69개의 50층 이상 초고층 건축물이 완공되었는데, 이 중 주거 용도로까지 활용 범위가 확장된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들이 이러한 예가 되겠다.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들은 생활의 편리함과 고급화된 주거 생활을 제공하면서 인기가 지속되고 있으나, 화재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여전히 취약점을 보이고 있다. 50층 이상의 초고층 주상복합 건축물에서 발생 가능한 사고들을 사전에 모두 예측하고 예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상황들을 대비하여 그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튼튼한 방어막들을 겹겹이 준비하여, 발생 가능한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입주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2010년 해운대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에서는 가연성 외부 마감 재료의 사용으로 인해 화염이 순식간에 수직으로 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초고층 건축의 불연성 마감 재료 사용과 관련한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최근 의정부 아파트 화재 사고로 인해 불연 재료 활용의 필요성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화재 발생 이후 골든 타임을 연장하기 위한 필수 요소는 화염 및 유독 가스에 노출된 환경으로부터 입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건물의 외부 마감뿐 아니라 내부 마감 재료에 대한 더욱 강화된 규제가 필요할 것이다. 이와 함께 매년 높아지는 초고층 건축물의 층수에 비해 현재 소방당국에서 구비한 최대 높이 15층(22m)의 고가 사다리차는 화재 진압 및 인명 구조에 활용하기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 역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초고층 건축물 같이 복잡한 평면과 높은 수직 동선을 가진 시설물의 경우 실내에 있는 사람이 피난하는 데 긴 시간이 소요된다. 연기가 확산될 경우 효과적인 대피 동선을 결정하는 데 큰 혼란이 발생한다. 따라서 시설물의 하드웨어적 측면 중심의 안전 관리(피난 계단, 피난 구획, 내화 구조, 불연 재료, 스프링클러, 소화기 등)와 더불어 지속적인 재실자 교육 및 신속한 정보 제공 등의 소프트한 측면을 강조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필자가 수행한 재실자 피난 행태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재실자의 절반이 평상시 지속적인 피난 교육을 받아 주변 사람들의 성공적인 탈출을 돕는 리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경우 전체 피난 완료 시간이 약 23% 감소함을 알 수 있다. 또 재실자 전원에게 화재 발생 직후 신속한 탈출 정보가 제공되었을 경우 전체 피난 완료 시간이 약 39% 단축됐다. 피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초고층 건축물에서는 연기 확산 등 다양한 불확실성으로 인한 재실자의 혼란을 줄여 신속한 탈출을 도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지원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개인의 교양, 시민의식,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전통, 문화가 그런 것들이다. 재난으로 인한 경험들을 토대로 우리의 안전의식을 고취시키며, 사회 안전 인프라를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 ‘치즈 모델’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문서 서울대 교수·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