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잃은 서울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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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작년 가을 어느날 오후에 나뭇잎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바람따라 마구 굴러가는 걸 지켜보다가 나는 문득 옆에 있던 학생들에게 말을 던졌다.『이렇게 가을이 물씬 풍기는 때 친구랑 만나 광화문쯤에서 따끈한 국수를 나누어 먹고 거기서부터 걷기 시작해 안국동 언덕을 넘고 호젓한 창경원담을 끼고 혜화동 쪽으로 걸으면 참 좋았지. 이야기도 즐기고 낙엽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그때 한 학생이 내 말을 받았다.
『어머, 거길 왜 걸어가요?』
아무리 낭만이 고갈된 젊은 세대라지만 이럴 수 있을까 싶어 한편 한심하기도 하고, 한편 그런 애들 앞에 내 소중한 젊음을 털어 놓으려 했던 것이 어찌나 면구스러웠던지….
그런데 며칠전 나는 광화문에서 한 친구와 만나 안국동 로터리로 가게 됐다. 멀지도 않고 날씨도 쾌청하고 해서 우리는 걷기로 했다.
중앙청 앞까지는 그래도 붐비는 가운데 열심히 이야기하려고 목소리를 높이고 사람도 비켜 가려고 애썼지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안국동과 중앙청사이 언덕길이라니-거리의 인파, 자동차 소리, 먼지, 배기가스 냄새, 보도를따라 이어지는 공사장의 기계소리, 걸어갈 길조차 거의 없는 와중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안국동 로터리를 한 바퀴 삥 돌아 겨우 육교를 건넌 뒤 우리가 찾아 가고자 했던 화랑에 도착했을때 내 기분은 엉망이 돼버린 파편조각같았다.
그러면서 불현듯 작년가을 『어머, 거길 왜 걸어요?』 하던 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환경속에서 젊은이들에게 낭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섭섭히 여겼던 내가 오히려 면구스럽게 느껴졌다.
문명과 경제성장에 떠밀려, 그리고 1천만명을 육박하는 인구에 파묻혀 서울이 「현대」 라는 공해에 이렇게 시달리다니.
서울시를 가꾸는 이들께 부탁하고 싶다. 성장할만큼 성장했으니 이제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서울로 만들어 달라고. <서울강남구압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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