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거창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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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거창신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숙종대의 명신으로 좌복사·참지정사(정1품)등을 지낸 정수. 원래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서기 1608년께 송의 사신으로 왔다가 우리나라에 영주하게 되었다. 학식이 높고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전해진다.
신씨는 「거창」을 단일본으로 하는 9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씨족. 그러나 긴 씨족사에 비해 인구는 적다. 전국에 약2만명, 성씨별 인구순위 70위. 이렇게 희성의 위치에 놓이게 된 원인은 시조로부터 13세까지 대대 독자로 혈통을 이어왔기 때문이라 한다.
거창신씨는 성자를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을 사용하지 않고 뜻은 같지만 모양이 다른「신」자를 고집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자에는 칼(칠)을 뜻하는 획이 들어 있어서 사람의 성자로는 좋지 않다는 선조들의 가르침을 지켜오고 있다.
2세의 신안지(인종조·병부상서), 7세 신짐평(고종조·대장군=동북면 병마사)등은 고려조에 가문의 맥을 이어온 인물들.

<인구 2만의 희성>
신짐평응은 고종조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도마저 강화로 옮겨야 했던 전란기에 군·민을 서해의 외딴섬 죽도로 옮겨 최후까지 몽고군에 대항했다. 그러나 그는 쌍성총관부의 총관이었던 조휘·탁청등의 몽고군에게 처절한 죽음을 당했다.
신집평이 숨지자 그의 외아들 신성은 정든 개경을 버리고 남쪽지방 거창으로 피난, 혈맥을 잇느다. 이후부터 그의 후손들이 거창 지방에 흩어져 살면서「거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신이애(편리주현사)은 조선초기에 거창신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는 분기(태종∼성종조·전라·강원도관찰사·백파의 파조), 신언(사추저령=중파의 파조), 신전)세종∼세조조·황해도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계파의 파조)등 3형제를 낳았는데 이들 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라 가문의 번영을 가져왔다.

<개경서 거창으로>
시조로부터 13대까지 아슬아슬하게 혈맥을 이어오던 신씨문중이 이때부터 무성한 숲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부터 연산조에 이르는 약1백년동안 거창신씨는 전성기를 맞는다.
신후갑 (세종∼세조조·대사성·대사간·예조참의), 신선경 (동지중추부사), 분승선 (성종조·영의정), 신수동 (연산조·좌의정)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조선초기부터 번창>
신승선은 단종 2년부터 성종대까지 4대에 걸쳐 중앙관계의 요직을 두루 거쳐 영상에까지 오른 당대의 명신으로 연산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위인 연산이 왕위에 올라 폭정을 일삼자 벼슬을 버리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들이 연산조에 좌의정을 지냈던 신수근이다. 신수근의 딸이 훗날 중종반정으로 폐비의 비운을 겪어야했던 중종의 첫 번째 비인 정씨였다.
정수근은 연산의 매부이자 중종의 장인이 되는 셈. 때문에 그는 박원종·성희언등이 중종반정을 도모. 동지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을 때 『매부(연산)를 택할 것인가 사위(중종)를 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야했다. 이때 그는 『국록을 받는 신하가 왕을 배신할 수 없다』며 반정에 협력을 거부했다. 그러나 거사는 성공했다. 반정주역들의 보복이 뒤따랐다.
신수근은 수겸(개성부류수), 수영(형조판서)등 두 형제와 함께 피살되었다. 연산비 신씨는 폐위되어 쫓겨났다. 또 중종이 왕위에 오른후 왕비로 책봉되었던 신수근의 딸 신씨도 반정공신들의 강력한 압력으로 왕비의 자리를 내놓아야했다.
신수근은 자신의 영화만을 위해 폭군 연산의 거세를 반대한 것인가. 이같은 질문에 대해 신두범씨(신씨세덕보편집인) 는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사위인 진성대군(중종)이 왕위에 올랐더라도 영화는 계속 누렸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신씨가문의 몰락에 얽힌 전설 한 토막. 예부터 거창읍 양평리 앞들에는 여자의 음부와 흡사한 거대한 음석이 솟아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음석이 신씨문 중에 부귀와 권세를 가져다 주고있다고 믿었다.

<음석이 부귀 불러>
연산조 어느날, 신씨문중의 흥성을 시기한 노승이 『음석을 없애면 가문이 더욱 번창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신씨문중은 노승의 농간에 속아 이 거대한 음석을 깨뜨려 없애는 대 역사를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신씨가문은 중종반정의 회오리에 휘말려야했다. 음석의 파괴는 수백년동안 신씨문중의 통한이 되었다.
지난 80년2월, 양평리 앞뜰 음석의 뿌리가 남아있는 옛터에 거대한 현대판 음석이 복원되었다. 후손 신종옥씨가 선조들의 한을 풀고 가문의 옛 영화를 되찾겠다는 염원으로 사재를 털어 음석을 복원한 것이다.
어쨌든 신씨문중은 중종반정으로 된서리를 맞고 한때 몰락의 길을 걸어야했다.
명종조의 대학자인 정희복(예조판서·우찬성), 신거관(중종조·호조판서), 신희남(중종조·강원도관찰사), 신천익(현종조·한성부윤)등이 중종조 이후의 명신들이다.

<「불사이군」을 고집>
신용욱은 우리나라 항공산업의 개척자로 기억에 남는 현대의 인물이다. 1922년 일본 「오구리 (소율)비행학교」를, 33년 미국 「실러 헬리콥터학교」를 각각 졸업, 조선비행학교장, 조선항공산업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했다.
해방후 대한민국항공사(KNA)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민간항공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2, 3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신도성(전통일원장관), 신용남(전국회의원), 신중하(전국회의원), 신순범(전국회의원), 신경훈(변호사), 신세범(변호사), 신승남(대전지검검사), 신만성(서울북부지청 검사), 신익성(서울인교수), 신두범(법박·부산대교수)씨등이 해발후 사회각계에서 활약해왔다. <글 김창욱·사진 김주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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