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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포스터로 본 1950~2000년대 북한 사회 변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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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상생활에서 미술작품을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나라는 어디일까. 다름 아닌 북한이다. 선전화라 불리는 포스터를 미술작품으로 인정한다는 전제하에서다. 아파트건 직장이건 길거리건 가는 곳마다 포스터가 걸려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그것도 당대 일류 화가들의 그림들이다. 대중 선전과 주입을 통해 체제를 유지해 온 북한에서 포스터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수단이기 때문이다.

 재중 사업가 김교준(47)씨는 6·25전쟁기인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북한 포스터 450점을 소장하고 있다. 자주 드나들던 베이징의 화랑에서 우연히 발견한 북한 포스터에 관심을 갖게 된 이래 적잖은 돈을 써 가며 포스터 원본들을 모았다. 그는 4년 가까이 공들여 수집해 온 포스터 450점을 최근 본지에 공개했다. 김씨는 “포스터 한 장 한 장이 모두 북한 사회의 실상을 증언해 주는 살아 있는 사료여서 이를 모으고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수집을 시작했다”며 “어느 정도 컬렉션이 갖춰진 지금 학자나 전문가들의 연구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공개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모은 포스터들에는 제작 시기와 그린 사람의 실명, 담당 부서와 제작 분량 등 구체적인 정보가 기재돼 있다. 북한 정부 당국의 보관용 자료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씨의 수집품을 시대순으로 나열해 보면 북한 사회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윤곽이 잡힌다.

 전쟁 복구에 주력한 50년대의 키워드는 경제였다. 족제비 650마리를 잡아 모피를 채취하면 자동차 한 대 값이 된다는 설명(포스터(6))이 나올 정도였다. 포스터 배경 그림을 보면 이 시기 북한 경제가 상당 수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제철공장에선 H빔을 자체 생산하고(10) 건설현장에는 타워크레인이 등장했으며 조립식 아파트 공법을 도입했다(8). 대동강 하구에선 ‘거대한 자연개조사업’이라 자랑할 정도의 대형 관개공사가 시행됐다(5). 입출금이 자유로운 보통예금은 연 3%, 정기예금은 4%라고 상품별 금리를 적어 넣은 저축 장려 포스터는 당시의 주민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4).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서면 총을 든 군인이 포스터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등 50년대와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관련 포스터의 경우 50년대엔 투표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거나(2) 투표 참가를 독려하는 내용(7)이었던 게 60년대엔 노골적으로 찬성 투표를 하자는 것(12)으로 바뀐다. 50년대엔 평화통일 구호가 심심찮게 등장(9)했으나 60년대부터는 무력통일을 뜻하는 그림이 많아졌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 개인 숭배와 주체사상 보급이 본격화됐다(16).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하는 체육대회 포스터를 보면 이어달리기 종목에 수령님께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란 설명이 붙어 있다(15). 이 무렵 포스터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김일성 선집이나 어록을 들고 있다. 50년대엔 수상이란 직함을 쓰던 호칭도 차츰 원수·수령·어버이로 변해 갔다.

 김정일로의 부자 세습에 관한 내용은 80년대에 단계적으로 등장했다. 세습을 암시하는 ‘대를 이어’란 표현이 80년대 초반 포스터에 처음 등장(19)하더니 87년에는 김정일의 실명이 적시되고 그의 출생지인 백두산 밀영이 배경으로 그려졌다(22).

 80년대에는 과학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포스터가 등장했다(21). 일본의 고속전철 신칸센, 프랑스의 초음속여객기 콩코드 등 서방 국가의 선진 기술을 북한 주민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학생의 책꽂이엔 수학·물리·화학·전자공학 서적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책꽂이의 제일 위 칸은 김일성 전기와 어록집이 차지하고 있다. 김일성 사상이 과학기술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는 사이 북한 경제는 피폐해 갔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토지 정리를 통해 경작지를 늘리자고 독려하는 포스터가 등장했다. 극심했던 식량난 타개책의 일환으로 보인다(23). 6·25전쟁 영웅 이수복을 찬양하는 포스터는 2004년 제작인데 한눈에 봐도 종이 질이나 두께, 인쇄 상태가 50년대 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김씨는 “52년과 2004년의 제작연대 표기가 서로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며 “북한의 경제시계가 거꾸로 돌아갔음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달부터 소장품 가운데 70점을 미국 뉴욕대 존제이칼리지에서 전시 중이다. 김정은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뷰’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포스터는 대부분 그의 소장품과 겹친다. 김씨는 “정부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면 서울에서 전시하고 도록을 발간해 맨얼굴 그대로의 북한 모습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S BOX] 정관철·류환기 등 공훈예술가 칭호 화가들도 포스터 그려

북한 포스터를 그린 화가들의 면면을 보면 정관철·류환기·박상락·곽흥모 등 북한 미술계의 대표적 화가들이 망라돼 있다. 풍경화와 정물화로 국내 미술계에도 널리 알려진 정창모도 1960년대 포스터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정관철은 화가로선 최초로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북한 1세대 화단의 대표적 존재다. 30년대 일본 유학생 출신인 그는 최초의 김일성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83년 숨질 때까지 미술가동맹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가장 아낀 화가였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6·25 2주년을 맞아 제작된 포스터 (1)가 그의 작품이다.

 류환기와 박상락은 선전화 전문 화가로 불릴 만하다. 류환기 역시 인민예술가 칭호와 김일성 수상 등 북한 예술가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의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화풍은 여타 포스터들과 뚜렷이 구별된다(12,13,18). 월북 화가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박상락도 많은 수의 포스터를 남겼다(2,1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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