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부산으로] "다음 영화는 한국 여성 얘기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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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국은 제 정체성의 뿌리죠. 그 속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요." '연어'들이 부산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국땅에서 태어났거나 자란 교포 감독들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는 모국 관객과의 만남을 고대하는 이들의 작품이 유난히 돋보인다. 12세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배연석 감독의 '아르헨티나, 나를 위해 울어주나요?'에는 이민자의 힘겨운 일상이 담겨 있고,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인터뷰한 그레이스 리 감독의 '그레이스 리 프로젝트'도 흥미롭다. 배두나가 출연하는 박미나 감독의 단편 '티 데이트'는 앙증맞고, 마이클 캥 감독의 '모텔'은 성장 영화에 담긴 재치와 위트를 보여준다.

모라 미옥 스티븐스는 "전쟁 같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인간사를 풀어가는 데 특히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 아래 사진은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가 직접 연출하는 모습.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사람이 모라 미옥 스티븐스(29)다. 그녀는 미국 영화계에서도 주목받는 신예 감독이다. 이번에 초청된 작품은 2004년 미국 대선을 배경으로 열성 공화당원과 진보적인 민주당원의 러브스토리를 '로미오와 줄리엣'에 빗댄 장편 데뷔작 '컨벤셔니어즈'(Conventioneers)다. 그는 이 작품으로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3일 전화와 e-메일로 그를 인터뷰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공 국제학을, 뉴욕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경력이 이채롭다"는 물음에 그는 엄마 얘기를 꺼냈다. "엄마는 한국인이에요. 어릴 적부터 엄마 손을 잡고 극장에 다녔죠. 이후에는 시와 단편 소설, 그림도 그렸죠. 대학 때는 연극 무대에도 섰고 연출도 했어요. 나중에 깨달았죠. 이 모두가 영화 감독이 되기 위한 징검다리였다는 것을요."

영화 '컨벤셔니어즈'는 절묘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공화당원과 존 케리를 지지하는 민주당원의 정치적 입장이 팽팽하게 맞선다. 그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은 폭발 직전의 화약고다. 그런데 두 남녀의 호감과 애정이 훌쩍 '금지된 선'을 넘는다. 그리고 영화는 인간과 정치, 둘 사이에 놓인 끈에 대해 묻는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정치적 입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아가죠. 그게 문제입니다. 그 속에 있으면 기존 입장이 더 강해지죠. 보수주의자들은 더욱 보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더욱 자유롭게 변해요. 양쪽 다 극단을 향해 달려가는 셈이죠. 그래서 이 영화는 미국 사회의 정치적 분리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입니다."

독립영화 감독이었던 그에게 지난 대선은 기회였다. "뉴욕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덕분에 돈 들이지 않고도 50만 명의 엑스트라가 등장하는 대작(Big Story)을 찍을 수 있었어요. 이제 '컨벤셔니어즈'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첨예했던 정치적 순간을 담은 타임캡슐이 된 셈이죠." 제작진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시위 장면을 카메라에 담다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컨벤셔니어즈'가 비단 미국 사회에 관한 영화만은 아니라고 했다. "지구촌 사람의 대부분이 부시 대통령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있죠. 그를 사랑하든가, 아니면 미워하든가 말이죠. 그래서 이 영화의 관객들도 두 주인공 중 한 사람과 강한 공감대를 가질 겁니다."

그가 준비 중인 두 번째 장편 영화 '조지아 히트'(Georgia Heat)도 만만치 않다. 영화 감독이기도 한 그의 남편 조엘 비어텔과 '조이 럭 클럽'의 재닛 양 등이 함께 프로듀서를 맡았다.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한국 배우 김윤진을 주연으로 캐스팅했고, 상대역은 안젤리나 졸리의 전 남편인 빌리 밥 손튼이 유력하다.

"'조지아 히트'는 미군과 결혼해 조지아로 건너간 한국 여성과 아들의 이야기죠. 전쟁에 의한 상처, 사회적 편견, 문화적 충돌을 씨줄과 날줄로 엮은 휴먼 스토리예요. 궁극적으론 부서지고 와해되는 가족, 그럼에도 그걸 지켜나가는 의미에 관한 얘기죠." 그 다음 작품은 아예 한국에서 모두 찍을 생각이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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