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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리더십] 1. 과학적 회계와 통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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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선 500년의 버팀목이었던 세종. 그는 문치를 강조하면서도 문약에 빠지지 않았고, 명나라에 사대를 하면서도 우리의 힘을 키웠다. 한글날을 앞두고 '정치가 세종'의 국가 경영 능력을 재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세종의 리더십'을 소주제별로 나누어 6회 연재한다. 기고는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산하 세종국가경영연구소(소장 정윤재) 연구원들이 맡았다.

제리드 다이아몬드는 퓰리처 상 수상작인 '총, 균, 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창안한 이유를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수메르의 설형문자에서 한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한글과 회계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세종 원년인 1417년 8월에 태종은 왕위를 넘기면서 나라 살림의 출납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감합법'(勘合法.서류의 좌우 대조 확인)을 도입한다. 출납 책임자의 서명.인장만을 사용했던 기존 방식에 덧붙인 시책이다. 이듬해 8월 세종은 태종에게서 회계장부.마적(馬籍).군적(軍籍)을 인수하면서 정사를 시작한다. 1421년 1월 16일 세종은 다시 사헌부의 건의로 감합제도 위에 '중기'(重記.복식부기의 필수 요건으로 동일 사항을 두 번 기입) 제도를 또 도입한다. 이후 각종 부정부패 행위는 중기 제도에 걸려 적발됐다. 1421년 11월 17일 제용감(왕실 물자를 관리하는 관청)에서 회계부정이 적발된 것이라든지, 1423년 1월 17일 수원부사가 미곡의 중기를 없애버리고 나라 곡식을 빼돌리다 적발된 사건들이 그 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에서 세종시대에 쓰인 회계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세종실록 제2권에 나오는 '중기(重記)'는 같은 내용을 두 번 적게 했던 제도. 약 600년 전에 세종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복식부기의 필수 요건을 실행했다. 이 같은 과학적 회계를 바탕으로 세종은 부정행위를 적발했다.

15세기 세종이 회계제도를 통해 국가 경영의 주요 기틀을 세운 것은 18세기 미국의 건국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모두 회계에 밝았다. 청교도의 노동윤리에 기초해 부를 창출하는 게 미국 시스템이다. 그 기초에는 정직성과 성실성을 요구하는 회계체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회계와 함께 세종시대 과학적 국가경영의 또 하나의 축은 통계(Statistics)다. 통계는 그 어원적 의미가 State(국가)+Technique(Craft.기술)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국가경영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은 전국 군.현 단위로 호수와 인구 수, 경지면적, 논과 밭의 비율 등 오늘날 국세 조사와 유사한 통계로 이뤄져 있다.

이러한 통계는 이를 생성하는 회계체계가 뒷받침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회계는 인류만이 지닐 수 있는 '쓰기 기술'의 종합 체계이자 기록학의 꽃이다. 그래서 서양의 지성 괴테는 회계를 "인류가 창안한 가장 위대한 문명"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런 회계체계가 세종 때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고유의 회계용어는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서문에 보이듯 대개 이두문자로 돼 있다. 이두문자는 한자를 기본수단으로 우리말을 적은 글로 그 음과 뜻이 중국과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은 곧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오고 물질적인 풍요를 보장하는 주요 기술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회계용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부와 어긋나는 부정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를 보자. 글은 '反作'으로 썼으며 발음은 '번질'이었다. 오늘날에도 감쪽같이 속이는 부정행위를 지칭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재고조사를 뜻하는 '反庫(번고)'도 이두로 쓴 회계용어다. '色'은 한자로는 색채의 뜻이나 그 뜻은 '빚'이다. 이를 국어 학계에서는 행정용어로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 그 기원은 회계용어로 금융행위를 지칭한다. 돈이나 물건을 빌려갈 때 썼던 '改色'(색갈이.호남 지방에서는 색걸이)이란 용어도 이두다.

이와 같이 소리글자와 뜻글자의 결합체인 이두문자를 통해 우리 고유의 회계용어가 정립됐다는 것의 최종적인 의의는 무엇인가. 회계의 본래 목적이 기록과 계산을 넘어섬을 의미한다. 즉 회계의 목적은 재산을 은닉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 장소에서 큰소리로 낭독하는 투명한 보고 행위에 있었던 것이다. 서구에서 회계감사를 'Audit'라고 하는 것도 회계와 듣는 행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전성호 세종국가경영연구소 비교연구실장

한국의 전통 조직에서 정기총회를 '강신회(講信會)'라고 했던 데에서도 회계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연말결산 보고서를 '낭독(講)'하고, 부정이 없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신뢰(信)'를 도모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전통은 무조건 폐기해 버려도 좋은 구시대 유물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회계.통계 체계에 기반을 둔 세종시대의 국가경영 리더십은 첨단 과학시대를 산다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전성호 세종국가경영연구소 비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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