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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한 은행 상품이 200종, 직원도 헷갈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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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한 시중은행은 요즘 지난해 팔았던 주가연계증권(ELS)에 대한 고객 항의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그동안 주가가 많이 올랐지만 가입자들은 오히려 큰 손실을 보고 있어서다. 문제는 상품 구조였다. 코스피 200 주가지수가 가입 시점의 20% 안에서 오르내리면 연 7% 대의 고수익을 보장하지만, 이 범위를 벗어나면 지수 변동 비율의 1.7배만큼을 손해보도록 돼 있었다.

이 은행 관계자는 "안전성을 우선해야 하는 은행에서 어떻게 이런 상품을 팔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워낙 상품이 많아지고 다양해지다 보니 하나 하나 제대로 관리하기 버겁다"고 털어놨다. 은행마다 상품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예.적금과 대출 등 은행 고유 상품만 팔던 예전과 달리 펀드와 보험.카드 등으로 상품이 다양해지면서 창구에서 파는 상품이 수백 가지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은 모두 193개의 상품을 팔고 있다. 신한은행은 133가지, 우리은행도 100가지다. 판매가 끝났지만 아직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상품도 은행마다 100여 개가 넘는다. 은행들은 또 자체 카드나 다른 금융사와 제휴한 신용카드 상품을 각각 300~400개씩 팔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상품이 워낙 다양하고 구조도 복잡해 창구 직원들도 헷갈릴 정도"라며 "이들이 상품 내용을 제대로 알고 파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 문제 속출=시중은행들은 최근 인기 방카슈랑스 상품인 변액보험의 판매를 일제히 중단했다. 변액보험은 가입자가 낸 보험료의 일부를 펀드로 운용해 수익률을 높이는 상품이다. 그런데도 고객이 낸 돈 전부를 주식이나 채권형 펀드로 굴리는 투자상품인 것처럼 팔았다가 민원이 속출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펀드와 달리 보험은 가입한 지 2년 안에 해지하면 원금의 절반도 건지지 못하는 등 전혀 구조가 다른 데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고객과의 사이에서 발생할 분쟁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신규 판매를 중단하고 기존 판매 실태를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파생상품도 골칫거리다. 올 초 엔화스와프예금(원화를 맡기면 엔화로 바꿔 예금한 뒤 만기 때 다시 원화로 바꿔주는 상품)에 대한 소급 과세로 곤욕을 치렀던 시중은행들은 최근 정부가 금리 및 통화스와프상품에도 과세한다는 방침을 내놓자 비상이 걸렸다. 재정경제부는 금리스와프상품에 대해 이익의 0.5%를 교육세로 물리고, 통화스와프상품에도 법인세를 부과할 예정이다. 과세 방침이 확정되면 만기에 고객들이 돈을 찾을 때 세금을 누가 부담해야 할지가 논란이 될 수 있다.

◆ 상품 베끼기가 원인=상품 관리가 부실한 것은 은행들이 '일단 내놓고 보자'는 식으로 엇비슷한 상품을 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선 특히 한 은행이 내놓은 상품을 다른 은행들이 노골적으로 베끼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아이를 낳으면 이자를 더 주는 예금, 독도 영유권 분쟁을 계기로 나온 통장 등이 대표적이다. 한 은행의 상품 담당자는 "일선 지점에선 종류가 너무 많아 팔기 힘들다는 불평이 나오지만 다른 은행과 경쟁하려면 다양한 신상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은행들이 도입한 첨단 전산 시스템은 상품 베끼기를 더 쉽게 해주고 있다. 전에는 상품을 새로 하나 내놓으려면 완전히 새로 프로그램을 짜야 했으나 지금은 기존 프로그램을 조금 손보는 정도로 신상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창의적인 금융상품을 개발한 은행이 일정 기간 독점 판매권을 갖는 '배타적 이용권' 제도도 유명무실해졌다. 이 제도가 도입된 지 5년이 지났지만 신청 건수는 20여 건에 불과하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금융 공학.수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상품 슬림화 시작=국민은행은 신용카드를 포함해 600개가 넘는 판매상품을 300개로 줄이기로 하고 최근 대대적인 상품 점검에 착수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은행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리스크(위험)가 큰 상품, 관리 비용에 비해 실적이 나쁜 상품 위주로 줄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흥은행과의 통합작업에 들어간 신한은행의 한 관계자도 "상품 종류가 많아 오히려 잘나가는 상품을 관리하는 데 애를 먹는다"며 "두 은행이 합치면 상품 정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현철.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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