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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살인, 벌어지기 전엔 못 막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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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채윤경
사회부문 기자

“내게 돌아오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지난 13일 경기도 안산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인질극을 벌인 피의자 김상훈(47)씨가 범행 일주일 전인 지난 8일 아내 A씨(44)를 찾아가 한 말이다. 김씨는 별거 중인 A씨에게 살인경고를 하고 A씨 허벅지를 흉기로 찔렀다. 일주일 뒤 김씨는 A씨를 불러 달라며 경찰과 대치하다 흉기를 휘둘러 A씨의 전 남편과 의붓딸을 살해했다.

 A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동안 김씨가 상습적으로 가족을 폭행했고 살해 협박도 여러 차례 했다. 둘째 딸을 성추행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후환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고 했다. 예고된 살인을 막지 못한 것이다. A씨와 딸들을 보호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가정 폭력이 상습적으로 발생할 경우에는 가족을 완전히 격리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배우자를 두 번 이상 때리거나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상습적으로 때릴 경우 접근금지명령 등을 통해 만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해 접근금지 명령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더 큰 보복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 가정 폭력을 ‘집안 일’ 정도로 생각하는 문화 때문에 경찰은 “두 분이 잘 화해하라”고 돌려보내기 일쑤다. 정성국 서울경찰청 검시관은 “가족범죄는 대부분 징후가 나타나는데 병원·사회기관·경찰 등이 단편적 처리 과정 속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고, 이것이 더 큰 범죄를 불러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원에서 접근금지명령을 내려도 실질적으로 강제하거나 접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가정폭력범죄 특례법은 법원이 가정보호사건 조사관, 법원공무원, 사법경찰관리 등을 통해 피해자 보호명령을 이행하고 있는지를 수시로 조사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지난해 11월 40대 남성이 70대 아버지를 때려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명령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찾아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A씨가 살해 협박을 받은 후 접근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더라도 김씨의 침입을 막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법원 직원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확인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에 따라 스토킹처벌법을 제정해 엄히 단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지금은 스토킹 자체는 범죄가 아니고 실제 폭력이 일어나야만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입법을 통해서라도 가정 폭력이나 스토킹이 단순한 ‘집안 일’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라는 인식을 뿌리내려야 할 때다.

채윤경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