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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다방, 체험 스튜디오, 박중훈 자장면 … 추억이 넘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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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이 지난달 1일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관람객들이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녹음을 체험하고 있다.

‘라디오 스타’를 찾아 강원도 영월로 향했다. 봉래산(800m)과 동강이 휘감은 이 작은 도시가 바로 영화 ‘라디오 스타’(2006, 이준익 감독)의 촬영지다. 옛날식 다방, 소박한 중국집, 오래된 세탁소 등 시골 동네 곳곳에 영화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영화가 개봉한 지 9년이 됐는데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엔 문화 체험공간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radiostar.or.kr)’까지 생겼다. 말하자면 또 다른 ‘라디오 스타’가 개봉한 셈이다. 오는 4월 정식 개관을 앞둔 라디오스타 박물관을 다녀왔다.

라디오 스타, 박물관 되다

강원도 영월의 어느 낡은 이층집. 익숙한 멜로디가 흐르나 싶더니, 이윽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괜찮은데~ 사랑 따윈 저버렸는데~” 영화 ‘라디오 스타’ OST로 인기를 모은 ‘비와 당신’이었다. 노래를 따라가니, 마침 영화 상영이 한창이었다. 이곳은 영화관, 아니 박물관이었다.

“옛 KBS 영월방송국 건물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거예요. 겉은 허름해보여도 안은 잘 꾸며놨지요” 라디오스타 박물관을 담당하는 영월군청 김환일 계장이 이해를 도왔다. 김 계장의 말마따나 박물관은 화려하지 않았다. 649㎡(약 196평)에 불과한 규모에 외관도 무척 소탈했다.

KBS 영월방송국은 KBS 원주방송국으로 통폐합되면서 2004년 문을 닫았다. 그 빈집을 빌려 영화를 촬영했다. 영화 흥행도 방송국 폐쇄는 막지 못했지만, 방송국 건물은 가치를 인정받아 박물관으로 부활됐다.

다양한 라디오를 볼 수 있는 전시관 ‘라디오 그 빛나는 시간들’

박물관 내부는 9개의 테마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박물관 이름은 영화에서 따왔지만, 영화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전시관 ‘라디오 그 빛나는 시간들’에선 국내의 라디오가 연대별로 놓여 있었다. 1959년 금성사에서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을 비롯해 클래식 라디오 30여 개가 한 벽면을 빼곡히 메웠다.

영월 주민들이 기증한 라디오 100여 개를 거칠게 쌓아 올려 만든 조형물도 인상적이었다. 한 관람객이 자신이 쓰던 라디오를 찾는지 조형물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라디오스타관’ 대형 스크린에선 영화 상영이 이어졌다. 마침 명 대사가 흘러나왔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커피 한 잔 어때요?”

김 계장이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계단을 오르자 익숙한 올드 팝이 주크박스를 타고 흘렀다. 음악다방에선 컴퓨터시스템이 DJ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신청곡 GOD의 ‘어머님께’가 QR코드로 찍힌 종이를 스캔하자 노래가 바로 흘러나왔다.

직접 라디오 녹음을 해보는 체험 스튜디오는 벌써 인기였다. 녹음실 3개가 마련돼 있었는데, ‘라디오 스타’ 시나리오, 뉴스·스포츠중계 자료 등을 대본 삼아 30분간 녹음을 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온 신영미(23)씨가 마침 성우 체험을 마치고 녹음실을 나왔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 우리 엄마랑 다시 와야겠어요. 저에겐 호기심 천국인데, 엄마에겐 추억의 공간이 될 것 같아요.”

박중훈 자장면과 다방 쌍화차

박물관을 나와 마을로 가는 길.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라디오 스타’의 이준익 감독이다. 대뜸 전화를 걸었다. 그는 9년 전의 영월을 “서정적인 동네”로 기억하고 있었다.

“석탄 산업이 쇠퇴한 뒤의 탄광촌은 어디나 비슷한 모습이에요. 인구가 줄고, 삭막한 기운만 남아있죠. 그런데 영월은 무언가 다른 게 있었어요. 시원하게 흐르는 동강 주변으로 터미널과 시장·다방 등이 늘어선 모습이 왠지 모르게 평온하고 서정적이었어요. 굳이 영화 세트를 칠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죠.”

‘라디오 스타’는 촬영 대부분을 영월 읍내에서 진행했다. 세트장에서 촬영한 게 아니라 영월 사람들이 먹고 자고 부대끼는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내친김에 영월 읍내 곳곳에서 영화의 흔적을 더듬어 봤다. 주인공 최곤(박중훈)과 박민수(안성기)가 머물던 ‘청령포모텔’을 비롯해, 공개 라이브방송을 열었던 별마로 천문대, 50년 역사의 곰세탁소 등 영화 속 추억의 장소가 그대로 다 있었다.

읍내 중국집 영빈관에서는 ‘박중훈 자장면’을 판다.

“그 자장면 집도 남아있나요?”

‘라디오 스타’에서는 유독 자장면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영화에 등장했던 그 중화요리 집이 바로 ‘영빈관(033-372-2220)’이다. 영빈관은 영화에서 이 감독이 주방장 역으로 깜짝 출연해 더 유명해진 곳이다. 가게에 들어가니 메뉴판 아래에 붙은 특별 메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박중훈 자장면’. 김종하(46) 사장이 촬영 당시 박중훈을 위해 만든 특별 메뉴란다.

“영화배우가 먹는 거라고 채소랑 건더기를 더 넣어줬는데, 박중훈씨가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그 뒤로 해물류를 더 담아 정식 메뉴로 개발했죠.”

김 사장이 박중훈 자장면을 내왔다. 갑오징어·대하·오징어채·표고버섯 등을 듬뿍 얹은 것이 먹음직스러웠다. 양은 웬만한 자장면 곱빼기보다 많았다. 가격은 8000원으로 9년째 그대로다.

영화 촬영지로 인기를 모은 청록다방

영화 속 인물들이 출근 도장 찍듯이 드나들던 ‘청록다방(033-373-2126)’도 여전했다. 영화에서 계산대를 지키고 있던 김종애(55) 사장을 직접 마주하니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청록다방은 영월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다. 시골 다방은 대부분 동네 중년층의 아지트지만, 청록다방은 젊은 층도 많이 찾는다. 김 사장이 “우리 다방은 시골 다방 같지 않게 가족 단위 손님이나 대학생 커플이 심심치 않게 드나든다”고 자랑했다.

낡은 찻잔, 정겨운 입담, 구식 난로와 허름한 테이블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배우 박중훈과 안성기의 사인이 빼곡한 자리에 앉아 이준익 감독이 추천해준 쌍화차를 시켰다. 날계란 동동 띄운 차를 휘휘 젓다가 시나브로 낭만에 젖었다.

●여행정보=서울시청을 기준으로 영월군청까지는 자동차로 약 3시간 거리다. ‘라디오 스타’ 촬영지와 라디오스타 박물관 모두 영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깝다. 라디오스타 박물관은 시범 운영기간을 거쳐 오는 4월께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어른 4000원, 청소년 3000원. 정식 개관 전까지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오전 9시~오후 6시. 월요일 휴무. 033-372-8123.

글=백종현 기자
사진=안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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