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리빙] 전세 대란 '면접까지 뚫어야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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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 종로구 A아파트 주인이 최근 동네 부동산 중개인에게 통보한 전세 세입자 면접 결과다. 이 주인은 계약을 희망하는 사람이 하루에 다섯 팀 이상 몰리자 직접 면접을 봐 세입자를 고르겠다고 나섰다. 8.31 부동산 종합대책 이후 불어온 전세대란으로 전세 구하기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 집 없는 설움에 두 번 운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최근 귀국한 원모(36)씨는 집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전세 계약을 했다. 전세 매물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급한 마음에 도장부터 찍었다. 지은 지 4년밖에 안 돼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었는데 이게 웬걸. 못이 사방에 박혀있고 벽지는 너덜너덜-. "이사하는 날 집을 처음 본 순간 설치미술을 보는 듯했다"는 원씨는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서울 잠실의 S공인중개사는 "8.31 대책 직후 2~3주 동안 전세 매물이 나오는 즉시 계약이 이뤄지곤 했다"며 "시간을 끌다 다른 사람에게 집을 빼앗길까봐 집도 안 보고 계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까다로워진 건 집주인뿐만이 아니다. 면접을 보자는 집주인을 통과해도 이번엔 들어갈 집에 지금 살고 있는 다른 세입자 눈치까지 봐야 한다. 현 세입자가 집 보여주길 꺼리기 때문에 집 한 번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아무리 남의 집 살이라고 해도 젊은 사람들은 '내가 살고 있으면 내 집'이란 생각에 집 보여주길 싫어한다. 그런데 전세대란으로 이사 나갈 집 구하기까지 어려워지다 보니 가급적 살던 집에 눌러앉겠다는 심산에 집 보여주기를 더욱 꺼린다.

서울 개포동 한성부동산 김미애 실장은 "집주인이 집세를 많이 올려달라고 하거나 월세로 바꾸겠다며 이사를 요구한 경우 특히 심하다"며 "저녁에만 된다, 너무 늦었으니 다음날 오라는 식으로 차일피일 미룬다"고 귀띔했다. "사는 동안에는 집을 보여줄 수 없으니 이사를 나간 뒤에 보라"고 요구하는 세입자도 적지 않다고.

그러다 보니 부동산 중개업자들도 죽어난다. 서울 청담동 S부동산 관계자는 "고객 시간에 맞추려고 주 7일 출근하지만 실제로 집을 볼 수 있는 날은 3~4일뿐이라 힘들다"고 털어놨다. "매물로 나온 집과 같은 모델의 다른 집 주인한테 애걸복걸해 대신 그 집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 전세대란이 불러온 새로운 신분제도

요즘 전세시장에선 새로운 신분제도가 생겼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신혼부부가 최상위 계층, 그 다음은 싱글 여성, 큰 자녀 가정 순이다. 어린 아이, 특히 형제라도 둔 집은 집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어린 자녀를 둔 이모(40.서울 개포동)씨는 "전세를 구하러 다니다 보니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에 울컥했다"고 털어놨다. 서울 잠실 S부동산 관계자는 "방충망을 바꿔달라는 등 주문이 많은 사람에겐 세를 안 주려는 추세"라며 "양도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입자에게 주소 이전을 하지 않도록 요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모(37.서울 신천동)씨는 "집주인 입장에서는 자기 집이 아닌데도 도배.바닥은 물론 장까지 새로 짜맞추는 신혼부부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를 주는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다. 안모(38.서울 논현동)씨는 "은행 융자를 받아 겨우 집을 마련했기에 8.31 대책 이후 늘어난 세금을 감당하려면 전세를 월세로 전환해서라도 현금을 확보해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박모(50.서울 방배동)씨도 "우리가 세를 살던 시절엔 집주인 눈치를 봤지만 요즘 젊은 세입자들은 자기 주장이 강하다. IMF 이후 전세가가 떨어졌을 때는 은행 융자를 받아 세입자에게 돈을 내줘야 했다"고 말했다. 시세대로 받아야 서로 탈이 없다는 것이다.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패밀리 리포터가 말하는 '세입자 선호도'

* 1순위 : 신혼부부

-자기 집처럼 구석구석 리모델링한다. 집주인 입장에선 돈 안 들이고 새 집을 만드는 셈.

* 2순위: 싱글 여성

-밥을 잘 안 해먹는 등 집을 거의 쓰지 않는다. 비록 청소를 안 해도 집은 망가지지 않는다.

* 3순위: 큰 자녀 둔 가정

-집을 꾸미지는 않아도, 망가뜨리지는 않는다.

* 4순위: 싱글 남성

-두 사람이 산다더니 친구들을 우르르 데려와 동네를 시끄럽게 한다. 집도 많이 망가진다.

* 5순위: 어린 자녀를 둔 가정

-집이 가장 많이 망가진다. 그래도 아들보다는 딸을 둔 집이 덜하다.

.피해야 할 집주인 유형

(1) 참견형

-집주인은 먼 곳에 살수록 좋다.

(2) 빚쟁이형

-집을 담보로 무리하게 대출받아 세입자를 골탕먹인다.

(3) 돈독형

-각종 수리는 세입자에게 미룬다. 틈만 나면 집세를 올려달라고 요구한다.

(4) 무식형

-임대차보호법도 안 통한다. 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나가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5) 불법형

-세금 부담을 피하려고 전입신고를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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