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덮어두고 기회 준 「브라이슨」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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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1년 여름, 나는 진퇴양난의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 한때 고민한 적이 있다.
당시 미국하버드대 이공학부의 『고든·메케이』장학생 (「고든·메케이」라는 사람의 유산과 유언에 따라 만든 장학금)으로 선발되어 그해 2월부터 미국에 유학 중이던 때였다.
나는 학년초(9월)가 아닌 학년도중에 미국에 도착한데다 영어회화가 익숙치 못한 탓으로 봄 학기 4과목 성적이 평균 B플러스에 불과해 2차연도 장학금특전마저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 때는 3개월간 하버드대교수인 「브라이슨」박사의 연구조수로 일하게 되었는데 맡은 일이 힘에 겨워 연구에 진전이 없었다.
「브라이슨」박사의 연구는 미국연방과학재단의 연구비로 진행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는데 연구부진이 미안하고 보고할 용기도 나지 않아 「브라이슨」교수를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하고 슬그머니 뺑소니를 쳤다. 그후 하숙집에서 전화벨소리만 나도 놀라고 편지통을 뒤질 때도 「브라이슨」교수의 호출장이나 퇴교통지가 아닌가 하고 살피는 등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것이 없어 9월 학기의 수강신청을 했다.
물론 그분의 강의는 피하면서 수강했다.
62년 2월이 되어 공학석사가 되었고, 봄 학기 박사과정수강신청을 하려할 때 국내에서 5·16혁명이 일어나 모든 해외주재군인은 해외근무2년 이내에 귀국, 신고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공군중위 신분이었던 나는 따라서 남은 1년 안에 공학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해야겠는데 교육계획을 짜보니 「브라이슨」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수강신청을 하고 강의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첫 강의시간, 엄한 꾸중이 있을 줄 알고 바짝 긴장했으나 교실에 들어선 「브라이슨」교수는 의외로 인자한 웃음으로 아는척했다.
그후에도 그분은 한번도 내 잘못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분이 내주는 숙제나 연구과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치웠고 그 중의 하나가 히트해 박사학위까지 받게됐다.
한번은 그분의 강의와 숙제가 너무 어렵고 부담스러워 다른 과목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학생들이 집단항의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 「브라이슨」교수는 『한국에서 온 미스터성은 잘해내는데 너희들이 분발해야할 것』이라고 호통쳤다.
잘못을 눈감아주고 기회를 주며 기다려준 은사 「브라이슨」교수의 은혜를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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