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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순간 재현해야 하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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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조는 곤룡포 대신 남색군복을 입고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섰다. 청 태종은 삼전도에 9층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올라앉아 수만 병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느긋하게 패전국 국왕이 베푸는 항복의식을 즐기고 있었다. 인조는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인솔, 백보 가량 걸어가 땅바닥에서 세 번 절하고 9차례 머리를 조아린 뒤 태종 앞으로 나아가 다시 세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 나라 역사상 치욕의 극을 이루는 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조 15년(1637년) l월 30일의 삼전도.
사가들은 그 날 삼전도에는 겨울답지 않게 안개까지 자욱했고 햇볕도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 삼전도에 공원이 만들어지고 공원 안에 인조의 항복장면을 뚜렷이 새긴 청동 조각비가 섰다.
이와 함께 이 공원 안에 삼전도의 치욕 2년 뒤 이 곳에 세웠던 삼전도비(원명 대청황제공덕비)도 석촌호변에서 옮겨 세워졌다.
이 비엔 『청 황제가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했다』는 등의 내용이 3면에 만주문, 몽고문, 한문 등으로 기록돼 있다.
수난의 역사를 되새기자는 뜻에서 공원을 만들고 이들 비를 세웠다는 것이 서울시 당국의 설명이다.
병자호란의 수난은 새삼 돌이켜 보기도 싫을 만큼 대단했다. 웬만한 부녀자들은 모두 청의 진중으로 잡혀들어 갔고 때문에 엄동설한에 부모를 빼앗긴 뒤 굶다가 얼어죽은 어린것들의 시체가 서울거리에 즐비했다. 그런데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했다』는 공덕비까지 세워줄 만큼 우리는 허약했다. 치욕의 역사를 되새기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이나 남아있는 사료(史料)만으로도 충분하다.
격앙된 목소리로 전화를 건 어떤 독자는 청태종 공덕비도 원래 있던 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라면 옮기면서 지금처럼 세울 것이 아니라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은 면을 밑으로 해서 뉘어놓고 곁에 안내판을 세워두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심양을 떠난 중공 여객기 피납 승객처리 문제와 관련, 「과공은 비예」란 의견도 나오듯이 항복비 건립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난의 역사를 되새긴다고 을사보호조약 조인 장면이나 한일합방 장면을 새긴 조각비가 덕수궁이나 경복궁 어디쯤에 따로 등장하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오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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