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중국 지도자들의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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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 세기말 우리가 겪은 냉전의 종식과 이데올로기 시대의 폐막에 세계 각국은 그동안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치 아래 국가와 사회의 발전 방향은 물론 모든 정책을 정당화했던 공산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세계사의 변화에 적응해 왔는가.

1949년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으로 무장한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이래 문화혁명과 천안문 사태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온 중국은 오늘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하며 우리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이 지난 10여 년에 만들어 낸 고도성장의 신화가 과연 어떠한 현실로 전개될지는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9월 초, 캠벨 전 캐나다 총리, 로만 전 루마니아 총리와 함께 베이징(北京)에서 만난 중국의 지도자들은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의 어려움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그러나 앞으로 미래의 국가 정책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명확한 인식과 확신을 보여줘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전 60주년을 경축하는 베이징 시민들은 3년 후로 다가온 올림픽을 기다리며 다소 들떠 있는 분위기였으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중국이 직면한 세 가지 과제를 침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첫째,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가를 안정되게 통치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는 상황의 논리다. 급속한 고도성장은 인민의 생활양식과 의식을 바꿔놓게 되며 과거와 같은 일사불란한 통제나 통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딜레마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접속된 인구가 억대로 접어든 오늘의 중국에서 다양화된 인민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정을 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둘째, 경제 성장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격차와 불평등의 문제는 중국의 경우에도 대단히 심각하다. 연안과 내륙 사이의 지역 격차를 비롯한 빈부 간의 소득 격차는 각종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물론 정보기술(IT) 산업 등을 통해 선진국 수준의 자산을 축적한 계층도 늘고 있지만 대부분의 인민은 아직도 보건 문제를 비롯한 빈곤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의 총생산, 즉 GDP로는 세계 6위면서 국민 1인당 소득은 110위라는 통계가 아직도 중국이 개발도상국임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 지난날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무력화된 이념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그것은 당과 정부가 당면한 심각한 과제다. 고도 성장, 정보화, 세대교체가 삼중으로 겹쳐진 중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통치 세력에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해 중국의 지도자들이 제시하는 이른바 과학적 대처 방안은 두 가지 원칙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우선 덩샤오핑(鄧小平)의 유훈을 거울삼아 계급혁명을 포함한 사변적이고 공허한 이념 논쟁은 절대로 피하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인간 중심의 사회 발전을 목표로 지향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구체적으로는 인민들의 욕구나 복지를 단일화하고 획일적으로 취급하는 과오도 반드시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민의 다양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조정하느냐가 통치의 핵심 과제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중국이 이러한 과제를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데에 지속적 고도성장은 절대적 필요조건이며, 경제 발전은 중국의 최우선 국가 정책임을 지도자들은 예외없이 강조하고 있다. 경제 성장의 동력이 소진되면 만사가 어려워진다는 판단이 중국 지도층에는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이치인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미 세계시장의 일부가 된 중국 경제의 운명은 세계 경제의 운명과도 직결된다고 그들은 강조한다. 그것은 중국 사회의 지속적 개방화를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추세로 수용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개방된 경제가 개방된 사회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인지,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의 민주화에도 연계되는 것인지는 학문적 논의의 차원을 넘어선 역사적 차원의 문제들이다. 그러나 중국 지도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세계가, 특히 아시아에 위치한 이웃이 함께 고민하며 논의할 수도 있다는 유연한 자세로 우리에게 지역공동체 건설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