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 읽기] 화가·시인의 눈에 비친 '남녀의 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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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스티븐 컨 지음, 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532쪽, 3만원

눈은 사랑이 오가는 창문이다. 시인 박인환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읊었다. 수줍게 더듬는 눈길, 안타까워 젖어드는 눈망울 속에서 사랑은 때로 타오르고, 때로 무너진다. 사람 눈은 수천 수만 종의 언어를 내뿜고 빨아들이는 만능 번역기다.

19세기 서유럽 문화사 연구자인 스티븐 컨(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교수)이 이런 남녀의 눈에 숨겨진 의미를 살피게 된 계기는 프랑스 인상파 미술과 문학이었다. 빛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순간적인 변화를 잡아내 표현하는 인상주의 예술에서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남녀 시선의 미묘한 대비는 중심 주제였다.

원래 제목 '사랑의 시선(Eyes of Love)'이 나타내듯 1840년에서 1900년까지 프랑스와 영국 미술.문학 작품에 나타난 애정의 시선을 분석하는 지은이의 시각은 건조하고 예리하다. 만남.놀이.누드.매춘.유혹.구원.결혼 등 우리 삶에 펼쳐지는 시시콜콜한 일은 모두 남녀의 눈길에서 시작했다.

남과 여가 서로 바라보는 19세기의 전형적인 자세를 지은이는 '청혼하는 구도'라 이름지었다. 여성은 곁에 있는 남성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남성은 그런 여성을 갈망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여자는 살포시 눈길을 내린다. 르누아르의 1868년 작'약혼자들(왼쪽 사진)'에서 넋을 잃고 연인을 쳐다보는 남자와 그 눈길을 비켜 세상을 내다보는 여자의 대조가 재미있다. 19세기 여성은 사랑의 밀고 당김에서 상상 외로 능동적이고 주도적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130여 점의 그림이 그 증거다.

19세기 화가는 왜 여성의 눈에 그토록 담대한 힘을 실어줬을까. 지은이는 "남성적 특권과 권력으로 인해 불균형해진 세계에 균형을 되잡으려는 창조적 노력"이라 풀이한다. 영국 '라파엘 전파' 화가 중의 한 명인 로세티가 쓴 한마디가 그 답일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녀의 눈과 더불어 끝났도다. 지옥도, 연옥도, 천국도."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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