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여객기의 불시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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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공의 민간여객기 한대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한국에 비상 착륙한 것은 어린이날을 맞아 동심에 젖어 있던 우리들에게는 뜻밖이고 놀라운 사건이다.
「중국민항」이라는 이 불청객은 어쩌면 국제사회, 특히 한국·중공관계에서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는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든다.
정부당국이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중공여객기는 승객 몇 사람에 의해서 강제납치 되어 한국영토에 불시착 한 것 같다.
비행기가 남의 나라 영토에 비상 착륙하는 경우는 크게 귀순과 납치의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중공기의 한국 불시착으로 한정하면 작년 10월 중공공군의 오영근 중위가 미그-19기를 몰고 온 것이 귀순의 경우 이고, 이번「중국민항」이 납치에 해당한다.
귀순이면 국제법의 일반적인 추세에 따라서 귀순한 사람이 원하는 나라에 망명을 주선, 또는 허가하고 기체는 착륙한 나라의 재량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문제가 그다지 복잡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번「중국민항」소속여객기처럼 백 명의 승객과 5명의 승무원이 무장한 납치범들에 의해서 폭력으로 납치되어 온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한편으로는「항공기 납치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입한 나라로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납치의 동기가 정치적일 때 납치범들을 그들의 국적 국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인도주의적 고려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관례를 무시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중공여객기의 불시착 사건 처리에서 한국은 항공기납치의「성역」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되고, 동시에 정치적인 신조를 달리하고,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서 한국 또는 제3국에 망명 처를 구하는 사람들을, 망명수단이 폭력을 통한 항공기납치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나라로 되돌려 보내어 인도주의와 국제적인 관례에 벗어났다는 평판을 받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중국민항」의 납치범들이 우리에게 안겨 준 숙제다.
문제를 한층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 사건이 한국과 중공간의 문제라 정치적인 고려가 배제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작년 오영근 중위의 귀순 때는 중공이 한국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할 명분이 없었다 그 사건은 떠들면 떠들수록 중공의 치부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공은 납치범들의 정치적인 동기 같은 것은 짐짓 외면을 하고 어느 모로 보나 부인할 여지가 없는 항공기 납치에 초점을 맞추어 모든 승객과 승무원, 그리고 기체의 반환을 요구할 것으로 짐작이 된다.
71년 발효하고, 한국과 중공이 함께 가입한 헤이그항공기 불법납치방지조약은 스카이 재크 행위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납치범들의 주관적인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적 목적이건 정치적 목적이건 예외 없이 납치범들을 기소하거나 국적 국으로 넘겨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국과 중공이 동시에 서명한 항공기납치방지에 관한 조약은 그밖에도「동경조약」과 「몬트리올조약」이 있다.
이렇게 보면 납치범들과 승객의 중공인도는 불가피한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과 유엔결의는 정치적인 망명의 허용을 강력히 규정하고 있어 항공기 납치사건의 처리는 나라와 그때 그때의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은 납치범을 처벌하자는 국제조약과 정치망명을 최대한 허용하자는 인권선언 및 유엔결의의 균형 위에서 처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 일은 한국과 중공간에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다.
이번 사건의 처리는 중요한 전례가 된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중공 당국과의 충분한 협의를 거쳐서 처리하되, 납치범 비호나 비인도적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요구같이 들리기 쉽겠지만 망명이건 납치 건간에 불시착한 항공기 문제의 처리에서도 착 국(이번 경우 한국)의 영토 적 비호권이 최대한 존중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사건을 신중하게 처리하는 방법의 하나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중공의 태도를 살피는 것이다.
항공기 납치사건을 우호적으로 처리해 준다고 중공의·대한태도와 정책이 바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의 영토주권을 지키는 의연한 자세로 사건을 처리하되, 한국과 중공간의 거리로 보아서 앞으로도 이런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헤이그조약에 따라서 우리가 납치범들을 중공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고 한국서 기소하여 형을 과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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