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기획] 맞춤 마케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친구보다 애인이 좋은 건 나 하나만을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나만, 나에게만, 나를 위해서만…. 이런 말들을 누가 싫어할까. 바로 이런 심리를 좇는 것이 '맞춤 마케팅'이다. 그런데 이런 서비스들, 돈 많은 호사가들이나 즐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별로 그렇지도 않다. 잘만 찾아다니면 비싸지 않은, 오히려 싼 맞춤들이 많다.

글=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단골 300명 입맛을 DB에

흔하진 않지만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회사원 이미나(31)씨가 그런 경우. 이씨는 후추를 먹으면 금세 호흡곤란 증세를 보인다. 그러나 "요리할 때 후추는 빼주세요"라고 주문을 하면 동행들로부터 유난스럽다고 눈총을 받기 일쑤. 이씨는 외식이 괴롭기만 하다.

채식주의자 김종욱(31)씨도 식당 찾기가 두렵기는 마찬가지. 종욱씨는 생선류는 조금 먹지만, 육류는 절대 입에 대지 않는다. 역시 알레르기 때문. 그래서 중소기업에서 영업팀을 이끌며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기가 이만저만 힘들지 않다. 만날 생선회만 먹으러 갈 수도, 그렇다고 고기집에 가서 혼자 쫄쫄 굶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런 이들도 갈 만한 식당이 늘고 있다. 서비스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당이 늘어나고 있는 것. 메뉴판에는 없지만, 한번 찾은 손님은 단골로 만들고야 마는 서비스다. 서울 논현동의 차이니즈 레스토랑 '미스터 차우'도 이 분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곳. 이를 위해 이 레스토랑은 손님 300여 명의 데이터 베이스(DB)를 구축해두고 있다. 이 DB에는 지난번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반응이 어땠는지부터 평소 테이블 매너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정보가 들어 있단다. 알레르기도 그중 하나. 덕분에 미나씨나 종욱씨도 '튀는' 주문을 하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물론 별도 비용이 들진 않는다. 이 레스토랑의 곽기훈 매니저는 "왼손잡이 손님을 위해 세팅을 바꿔놓는 정도는 기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저희 레스토랑에서 자주 맞선을 보는 여성 고객이 계신데, 그분은 대화 나누기 쉽고 '조명발'이 좋은 자리로 모시죠. 그러면서도 자주 왔다는 티는 나지 않도록 모시는 게 핵심입니다"라며 웃었다.

영어도 '맞춤 수업'시대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김남구(38)씨. 업무에서 영어를 써야 하지만, 입을 떼는 일조차 어렵다. 영어만 하려고 하면 입 안이 마르기 때문. 전형적인 '영어 소심증 환자'다. 학원도 여러 군데 다녀봤지만, 교실에서조차 다른 수강생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모두 중도에 포기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이성식(32)씨도 영어 때문에 고민이 많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MBA(경영학석사과정)에 지원하려는데, 영어 점수가 받쳐주지 않기 때문. 매일 아침저녁으로 학원에 다니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워낙 바빠 수업을 거의 못 듣는 바람에 벌써 여러 번 학원비만 날렸단다.

이렇게 영어 때문에 고통(?)받는 회사원이 많다 보니 최근에는 '맞춤 수업'을 하는 학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달 초 서울 강남에 문을 연 'YBM원투원'도 그런 곳이다. 누구든 이 학원을 찾으면 우선 '맞춤 코디네이터'와 대화를 해야 한다.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와 공부의 어려움 등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놔야 하는 것. 그 후에야 원어민 강사를 만나 실력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 평가 결과가 나오면 수강생은 다시 코디네이터를 만나 편한 수업 시간과 수업의 내용 등을 결정하게 된다. 수업은 당연히 모두 일대일. 이 과정에서 학원이 내세우는 목표는 "정해진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수강생에 맞춘다"라는 것이다.

실제 이 학원은 남구씨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쉬운 교재를 가지고 하루 3시간씩의 '스파르타식 수업'을 해준다. 반면 성식씨에게는 매주 편한 날을 골라 수업을 잡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맞춰 주다 보니 가끔 재미있는 요구를 하는 이들도 있다. 한 다국적 기업 한국지사의 간부는 최근 본사 방문을 앞두고 "'출장용 예상 영어 문장'을 뽑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단다. 이 학원의 김은영 코디네이터는 "개원 3주 만에 수강생이 40여 명으로 늘었다"며 "상담도 하루 20여 건으로 꾸준하다"고 말했다.

기성복보다 싼 맞춤 양복

남성 정장은 '맞춤 양복'뿐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어느 동네에서도 어렵지 않게 '○○양복''△△라사(羅紗)' 같은 간판 하나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맞춤 양복 전성시대는 '기성복 대공세'가 시작된 1980년대 끝나버렸다. '찍어내는' 기성복의 가격경쟁력을 맞춤 양복이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

그러나 맞춤 양복 시장이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다. 요즘 서울의 사무실 밀집지역에 나가보면 맞춤 양복점 간판이 부쩍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안 좋은데 양복까지 맞춰 입는 사람이 있으려나'라고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지만, 돌아온 맞춤 양복의 '역습'은 간단치 않다. 얼마 전 압구정동에 문을 연 한 양복점은 지난달 무려 4000만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목에 따라 월 매출 1억원이 넘는 곳도 있다는 게 관계자의 귀띔이다.

이처럼 맞춤 양복이 부활한 것은 '발상의 전환' 덕분. 쉽게 말해 맞춤 양복은 혼자는 만든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것이다. 지난해 9월 목동점을 연 이후 1년 만에 10곳의 매장을 연 맞춤 양복 브랜드 '안드레아바냐'. 이 회사는 조그만 매장에 치수를 재는 점원 2~3명만 둔다. 이들이 치수와 함께 고객이 선택한 디자인만 알려주면 공장에서는 생산에 돌입한다. 재단 따로 제봉 따로 진행되는 방식. 기술자 한 명이 모든 과정을 혼자 해내야 했던 기존 맞춤 양복점에 비해 작업 속도가 빨라진 것은 당연하다. 기성복 업체의 생산 방식을 빌려온 것. 그러나 이 회사는 따로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는다. 주문 들어온 만큼만 만들기 때문에 재고가 생길 일도 없다. 게다가 '이름'만 빌려주는 유명 디자이너에게 들어가는 돈도 없다. 이러다 보니 고객들은 기성복보다 싼 19만원으로도 양복을 맞출 수 있다.

자신만의 양복을 싸게 가질 수 있다는데 '매니어'가 생기지 않을 리 없다. 올 초부터만 벌써 다섯 벌을 맞췄다는 회사원 인지현(27)씨. 그는 "명품 양복 스타일을 기억해뒀다 주문만 하면, 바로 입을 수 있다"며 "파티 같은 데 입고 갈 옷도 맞출 수 있어 좋다"고 '맞춤 양복 예찬론'을 펼쳤다. 안드레야바냐의 강형주 사장은 "다른 업체들도 비슷한 생산 방식으로 원가를 낮춰 싼값에 맞춤 양복을 제공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저가 맞춤 양복 시장은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