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던진 헌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누가 성직자에게 헌금의 용도를 물었다. 먼저 한 목사가 대답했다.
『나는 땅에 줄(선)을 긋고 하늘을 향해 돈을 던집니다. 오른쪽에 떨어진 돈은 자선사업에 쓰고, 왼쪽에 떨어진 돈은 나를 위해 쓰지요
그 앞에 있던 신부가 이 말을 받았다.
『나는 땅에 둥근 원을 그려놓고 모인 돈을 모두 하늘로 던져 올립니다. 그래서 원 밖으로 떨어진 돈은 생활비로 쓰고, 원안에 떨어진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씁니다.
이들의 얘기를 듣고 난 랍비(유대교 율법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나도 역시 여러분처럼 헌금을 모두 하늘로 던집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거두어 가시고, 남은 돈은 모두 지상으로 던져 주시더군요.』
물론 꾸며낸 얘기다. 평소 유머를 즐기는 유대인들의 농담이다. 그 중에서도 랍비는 허술한 구석이 없다. 청빈한 성직자들에겐 고소를 자아낼 일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장로협의회가 주관한 한 세미나에선 바로 그 헌금이 비판과 자성론의 대상이 되었다.
병을 고친다는 신유(신유)나 축복을 통한 「흥분 속에서의 헌금」「하느님과 흥정하는 헌금」「위신 과시의 헌금」 등은 특히 「후회하는 헌금」의 사례들로 지적되었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연간 헌금액은 l조3백41억원이나 된다. 이것은 기독교 스스로가 밝힌 4년 전의 집계다. 같은 해(초년) 우리나라 내국세 총액은 3조원.
3분의1도 넘는 헌금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논의의 초점은 헌금의 규모보다도 그 방법과 용도에 집중되었다.
헌금에 관한 성서의 언급은 「구약」에 있다. 바로 십일조의 대목이다.(민수기18·21,신명기12·17) 그러나 오늘의 신학자들은 그해석이 한결 같지 않다. 구약시대, 목축이나 농경생활의 단조로운 관습을 오늘날에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라는 주장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주로 현물이었다. 교회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었다. 문자 그대로 애찬이며, 애연이었다.
우리의 생활풍습은 2천년의 터울이 말해주듯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복잡 다양해졌다. 우리를 휩싸고 있는 삶의 모습이 그렇고 현실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십일조의 적용에도 조세와 마찬가지로 「기초공제」의 개념이 적용되어야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률적으로 총수입의 10분의1이 아니다.
더구나 오늘의 일부 교회들이 궁전같은 건물에, 은행원이 동원되는 헌금집계와 같은 작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성직자의 청빈과 겸손과 자애로운 생활은 어쩌면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빛과 소금인지도 모른다.
이런 논의가 종교인들 스스로에 의해 제기된 것은 반갑고 다행한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