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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수용 때 보상 '시가에 가깝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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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트랙터로 한 시간 이상 가야 하는 곳으로 이주시키면 농사는 어떻게 지으란 말이냐. 땅 보상금으로는 새 집을 마련할 수도 없다. 평당 최소한 250만원 하는 땅을 200만원 남짓에 가져가려 한다."

대전시 유성구 봉산동 주민들은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위해 삶의 터전을 내놓았으나 보상금이 턱없이 적고 이주대책도 미흡해 살길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주거환경개선사업 백지화투쟁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구본환(42)씨는 "땅과 건물을 시가 기준으로 보상해 주고 새 아파트에 입주하기 전까지 지낼 임시 거처나 농기계 보관소를 동네(주거환경개선지구) 안에 마련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보상금으로는 아파트 입주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워 원주민의 70%가량이 고향을 떠나야 할 판"이라며 "보상가를 현실화하거나 원주민을 내쫓는 주거환경사업을 백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사업 시행자인 대한주택공사는 "규정에 맞게 보상을 하고 있다"며 주민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곳처럼 땅 보상을 둘러싼 갈등은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행정도시 예정지인 충남 연기.공주 일원에서는 아직 구역이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보상가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지난 8일 정부의 보상대책이 나오자 일부 주민은 "행정도시 예정지가 2210만 평인데 보상가가 4조6000억원이라면 평당 20만원의 헐값에 보상하겠다는 것 아니냐"며 "전문기관에 맡겨 전체적인 보상가를 책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땅 보상 분쟁 줄일 대책 세운다=지난해 사업지역에서 자체적으로 합의하지 못해 토지수용위원회에 보상금 조정을 신청한 '수용 재결' 건수는 990건. 일산 신도시 규모와 맞먹는 455만 평이다. 땅 보상 분쟁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올해 말부터 행정도시를 비롯해 혁신도시(공공기관 이전지), 기업도시, 수도권 신도시 등의 건설이 본궤도에 오르기 때문이다. 정부도 땅 분쟁이 격화할 것에 대비해 새 보상대책 마련에 나섰다.

건설교통부는 보상제도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한국부동산연구원에 의뢰했다고 12일 밝혔다. 건교부는 용역 결과가 나오는 6월 중순 이후 공청회 등을 거쳐 새로운 보상제도 시행 방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건교부는 땅을 수용할 때 국민의 재산권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현재 보상 기준이 되고 있는 공시지가에 '정상적인 거래 가격'을 일부 가산하는 '정당보상' 개념을 정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당보상 가격은 호가나 투기적 거래가격보다 낮지만 공시지가보다 높아 토지 소유자들의 보상 불만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생활권 보상 강화=건교부와 용역연구팀은 새로운 보상 안을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미리 샐 경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지역에서 땅주인들이 보상 협의를 늦춰 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주대책 같은 간접 보상은 강화할 방침이다. 연구팀 관계자는 "주민이나 지주가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 범위를 토지.지장물.영업손실 등의 직접보상뿐 아니라 이주대책.생활대책 등 간접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땅 자체에 대한 보상 불만에는 수용 재결 등 이의신청 절차가 있지만 이주대책 등에 대해선 법적으로 보장된 보상 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선진국에서는 땅이나 건물 값을 제대로 쳐주는 것뿐 아니라 이주자의 평온한 삶, 즉 생활권을 보장하는 보상 개념을 강화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건교부는 보상 때 생계대책 등과 연계해 보상금 지급 시기나 방법을 다양화한 이른바 '맞춤형 보상제'를 도입하기로 하고 행정도시에 시범 적용할 방침이다.

정락형 중앙토지수용위원회 상임위원은 "농사를 계속 지을 사람에게는 농토를 알선해 주고 직장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직장을 구해주는 것과 같은 일 대 일 서비스를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모델을 다른 사업지역으로 확산시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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