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문화 원류 찾아 18세기 파리로 시간여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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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호 22면

18세기 프랑스 귀족 저택을 그대로 재현한 침실의 모습. 화려한 꽃문양의 직물 벽지로 장식된 이곳은 아침마다 화장과 치장으로 하루하루 ‘미(美)’가 재탄생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최신 유행 스타일로 한껏 멋을 부린 프랑스 귀족들.

‘파리, 일상의 유혹’. 한국인들이 가장 살아보고 싶은 도시가 어디인지를 간파한 작명이다. 어느 날 훌쩍 떠나 며칠간 잘 먹고 잘 쉬며 충전하고 싶은 곳과 한 달이라도 터를 잡고 현지인들과 살을 비비며 그 풍경 안으로 녹아 들어가고 싶은 곳은 엄연히 다르지 않을까.

예술의전당 프랑스장식예술박물관전: 3월 29일까지

지난달 13일부터 3월 2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했다는 게 미덕이다. 프랑스 장식예술박물관 개관 150년 이래 첫 해외 전시를 위해 공간 전문가인 필립 르노가 직접 나섰다. 모티브는 파리에 있는 로댕 박물관. 당시 큰 돈을 벌어들인 금융가 페이랑그 드 모라스의 저택을 본떠 현관부터 정원까지 그대로 재현했다. 작품 하나하나를 개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320여 점의 작품이 일상 공간에 한데 어우러지도록 피리오드 룸(period room) 방식을 택했다.

베스티뷜(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18세기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바닥에는 귀족의 집임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문양의 대리석 타일이 깔려 있다. 앙티샹브르(대기실)의 벽에는 루이 15세가 사랑한 화가 장 밥티스트 우드리의 개 그림이 걸려 있다. 가마에서 막 내린 듯한 귀부인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누군가의 초대를 받고 이곳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혼자 둘러보면 다소 평범한 모양새에 지레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도슨트의 설명을 듣다 보면 다르다. “원래 스트라이프 무늬는 죄수나 하인만 입는 옷에 사용됐어요.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해당 문양을 활용한 드레스를 주문하면서 당대 최고 유행이 됐죠.” 귀부인이 입고 있는 스트라이프 드레스를 보며 저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살롱에는 보다 많은 함의가 숨겨져 있다. 내가 ‘얼마나 잘 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힘을 준 포인트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를테면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덧댄 나무는 곧게 뻗은 랑브리 장식으로 거듭나 신고전주의적 직선미를 뽐낸다. 최고급 양모로 수놓은 태피스트리가 양쪽 벽을 하나씩 차지해 균형을 맞추는 식이다. 샛노란 벽 색깔과 어울리는 옥빛의 가구는 절기별로 바꿨다고 하니, 아름다움을 향한 귀족들의 열망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공간은 단연 침실과 가르드 로브(드레스룸)다. 긴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최적화된 하트 모양의 의자나 화장대 위에 놓인 애교점 찍는 도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여성들의 치장 욕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루이비통 1호 가방과 똑 닮은 여행 가방도 볼 수 있다. 이는 루이비통이 18세기 공방에서 만든 작품을 샘플로 삼아 작업 후 기증한 것이다. 의자로 위장하고 있는 비데도 여기서 볼 수 있다. 당시에는 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화장실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그루밍 역사도 엿볼 수 있다. 평소 가발을 즐겨 쓰는 탓에 대머리가 된 이들이 가장 개인적인 공간인 서재에서만큼은 이를 슬쩍 벗어놓았다. 가발 보관대와 실내용 모자 장식대가 전시장 한켠에 비치된 이유다. 이중 덮개 시계는 기본, 기온ㆍ기압계까지 있다. 담뱃잎 분쇄기와 담배갑 등을 보고 있노라면 남자도 얼마든 사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디테일의 힘이다. 분수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식 정원을 둘러싼 까만 벽에는 상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디자이너가 직접 귀족 저택을 방문해 의상을 판매하던 생활사를 녹여낸 것이다. 침대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은 이유 역시 방문객들이 내려다보는 시선이 싫어서라든가 떨어지는 쥐를 막기 위해 캐노피를 만들었다든가 하는 설명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각 공간을 지키고 서 있는 마네킹 역시 이번 전시를 위해 2주에 걸쳐 새롭게 빚어낸 ‘신상’이다. 마네킹에 옷을 맞출 수 없으니 옷에 마네킹을 맞춘 셈이다. 덕분에 걷기 싫어하는 당시 귀족 체형 그대로 짧고 얇은 다리를 갖게 됐다는 게 도슨트의 설명이다. 방마다 특색있는 벽지는 리빙 브랜드인 피에르 프레이의 작품이다. 가구를 먼저 사고 이에 맞춰 벽지를 직조하는 당시 스타일대로 전시 물품에 맞춰 직접 제작 및 후원했다.

평면으로 꾸며진 공간의 뒷면은 제작도로 채워놓았다. 식당 뒤편에는 포크 하나를 만들기 위해 6개의 손잡이 디자인이 그려져 있어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친한 지인들을 초대해 게임과 담소를 나눴던 프티 살롱 뒤쪽엔 카드놀이용 원형테이블 도면이 붙어있다. 평상시에는 반달 모양으로 접어 벽에 붙여놓을 수 있도록 한 접지선이 눈에 띈다. 어떻게 하면 좁은 방에 더 많은 물건을 수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켜켜이 쌓여 생활사가 됐음을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관람을 마친 한 모녀가 “아, 케이크 먹으러 가고 싶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이 전시의 목적은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럭셔리라고 부르는 고급 문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들려주고 싶다”고 전시 기획의도를 밝힌 올리비에 가베 프랑스 장식예술박물관장이 “오늘날의 럭셔리는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마음, 즉 일상에 깃든 것”이라고 한 설명이 떠올라서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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