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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자유당과 내각(3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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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족청에 정통한 사람들은 족청에대한 평가가 실세이상으로 과장되어 있다고들한다. 예를들어 「촉청12인조」라면, 국회의 양우정·김익로·김광준·김제능·최헌길(강원지사)의원등이고 내각에는 진헌식내무·이재형상공, 군에는 원용덕헌병사령관을 손꼽지만 이중에서 청년단에 참여했던 사람은 김제능씨뿐이다.
족청에 대한 S씨의 증언을 옮겨보자.

<인심도 많이 잃어>
『촉청이 한때 세력을 떨쳤다고 하지만 얘기대로의 그것은 아니다. 예컨대 촉청사람밑에서 중요직책에 있었거나, 승진했거나 친했으면 「족청계」라고 했다. 나도 정부 어느부처의 과장을 했다고 촉청계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촉청계라는 사람들중 지도부엔 인재도 있었지만 하부조직에선 실인심한 사람도 많았다.
촉청이 강제해산될때 아쉬워한 사람은 당사자들 외에는 없었다는것이 실인심을 반증한다.일부에서는 족청계가 제1공화국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건재하다는 사실을 들어 족청의 우수성이라고 내세우지만 꼭 그렇게만은 볼수없다. 그야말로 초기엔 군수감도 찾기 어렵던 때여서 촉청 출신중 우수한 인재들이 일선에서 일했지만 그것은 개인으로서였지 족청세력으로서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백두진씨가 제3공화국에서 국무총리·국회의장을 지낸것은 환골탈태한 백씨이지 족청인물로서의 백씨는 아니다. 백씨는 촉청이 서리를 맞던때 이미 환금장유사건으로 족청과 대립했다.
백두진씨가 은행에 있믈때 미군정 지시에 따라 족청에 자금을 대주는 책임자였고 그 연고로 촉청에 가까왔다. 그가 총리로 되는 단계에서도 촉청의 지지를 결정적으로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백두진씨는 이범석과 함태영의 중간에 서려고 노력했다.
백두진씨와 진헌식내무도 처음 한동안은 무척 사이가 가까왔으나 나중에 오해로 인해 돌이킬수 없는 사이가 됐다.
함태영씨가 부통령이 됐을때 진헌식씨가 내무장관이 되고 백두진씨가 상공장관이 됐는데 이는 서로 뒤를 밀어준 결과였다.
또 나중에 반족청계에서 백두진씨를 모략하기 위해 「닭피사건」을 조작했는뎨 내무부에서 이를 조사, 백씨의 누명을 벗겨주기도 했다.
닭피사건이란 반족청계에서 부산에 있는 파초다방 마담을 이용, 혈서를 써서 백씨를 모략하려했으나 그 혈서가 닭피로 씌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사건이었다..

<"혈서는 닭피였다">
그뒤 족청계인 원용덕헌병사령관이 환금장유사건을 조사했는데 당시 백씨의 매부되는 김중호씨가 환금장유를 하고있어서 항간에는 촉청에서 백씨의 정치자금을 끊는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백씨는 진내무와의 돈독한 우의를 생각하고 염두에 두지않고 있었는데 그 얼마뒤에 일어난 다른 사건, 세칭 「허××사건」에서 사이가 벌어겼다. 이 사건은 백두진씨가 총리였던 때인데 백총리와 가까운 허모씨가 달러화를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해운대에서 밀항하려한다는 소문이다.
이 얘기는 족청계 7∼8명이 모인 자리에서 나왔는데 군보다는 경찰에 맡겨 사실을 조사해 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져 진장관이 조사를 하게됐다.
그런데 백총리가 얼마 안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되자 <비촉청계에서 공격을 받고있는데 족청까지 나를 잡으려하느냐>고 오해하게 됐다.
「허××사건」에 앞서 백씨가 총리로 인준될때의 일이다.
당시 서상권법무와 백두진재무가총리 물망에 올랐는데 진내무는 백재무의 총리승진을 뒤에서 밀었다.
총리로 인준되기전 여럿이 모여 정보를 나눴는데 경찰정보로는 85표밖에 얻을수 없다는 분석이었다.
그런데 황호령재무부 이재국장이 몇군데 더 체크하더니 1백3표쯤 나올것 같으니 그대로 표결에 붙이자고했다.
국회표결에 붙인 결과 꼭 1백3표가 나와 총리인준을 얻어냈다.
백총리도 진내무가 이렇게 자신을 도와준것을 알고 있었기때문에 환금장유사건이 터졌을때도 항간의 소문을 일축했으나 「허XX사건」이 터지자 화가 나고 말았다.

<김창룡이 앞장서>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서상권법무와 진내무는 사이가 안좋게 됐고 이때는 정가에서 이기붕을 중심으로한 주류파 자유당이 은밀히 고개를 드는 시기였다.
이박사의 「족청해산」은 말그대로 촉청의 해산을 의미했지 족청계 정치인의 해산은 아니었다.
그런데 황호현내무차관이 쓸데없이 돌아다니자 촉청제거 공개성명이 나온것이다. 바로 그전에 이미 족청계에 대한 주류파 자유당의 공세는 시작되고 있었다.
족청계 정치인들이 이박사로부터 미움받는것을 알고 주류파 자유당에서 공세를 취한것이다..
이박사가 촉청계 정치인을 제거할의사가 없었다는것은 진내무의 후임으로 백한성씨가 온것을봐도 알수 있다.
백한성씨는 정치세력과는 전혀 무관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족청을 때려 잡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원용덕헌병사령관이 그대로 남은것도 이를 증명한다.
원용덕의 헌병사령부가 일종의 근위사단이었지만 이박사가 촉청을 잡으려했다면 원용덕도 바꿨을것이다.
백두진총리는「허××사건」뒤 총리인준과정에서 자신과 겨뤘던 서상권법무와 손을 잡고 나중에 진내무를 공격하게된다.
정국은사건이 그것이다.
백두진총리는 손원일씨를 국방장관에 기용하고 손장관은 원용덕을 견제하기 위해 김창룡특무대장을 쓰게된다. 김창룡은 누구보다 족청타도에 앞장서게되는데 김특무대장은 「국제간첩사건」, 즉 정국은사건에 제일 먼저 착수하게 된다.
진헌식장관은 정국은과는 보성전문 사제간이었고 그 때문에 이 사건에 진내무도 심문을 받게된 것이다.
4선의원인 P씨도 족청세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데 같은 의견이었다. 예를 들어 박제환씨가 장면내각의 각료가 된것도 족청의 끈질긴 뿌리로 인용되지만 그것은 내막을 모르는 얘기라고 했다..
당시 민주당 신파는 구파에 이기려니까 무소속의 도용이 필요했고 그럴때 무소속의 리더였뎐 L씨가 자기말을 고분고분 잘 들을 인물로 박씨를 내각에 천거한것이지 족청의 맥을 찾은것은 아니라고 했다. 또 촉청은 이념으로 뭉친 l백만 단원이라고 했지만 정녕 그랬다면 이박사의 한마디로 뿌리가 뽑힐리야 있느냐는것이 P씨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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