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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현의 마법 … 바흐 음악 새 경지로 인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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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존 필리, 바흐의 ‘무반주첼로모음곡’ 을 기타곡으로 편곡해 연주했다.

한 사람의 아일랜드 기타연주가가 나를 다시 기타곡 애호가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기타곡을 들어보려고 음반을 뒤져보니 놀랍게도 이른바 오리지날(수입반) LP반이 10 여매나 발견되었다. 수입금지 시절 음반이니 적어도 수십년 묵은 것이고 그동안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수입반은 값도 녹녹치 않고 물량도 적어 큰 맘 먹고 가게에 찾아가도 두세 장 구입으로 끝인데 기타 곡이 이만큼 끼어 있다는 게 이해 곤란이다. 아마 다른 악기들과 달리 사람 체온이 실린듯한 기타 소리의 독특한 매력, 그리고 뭔지 분명치 않으나 이 악기가 지닌 잠재력에 나는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음반들 가운데 보케리니의 기타 5중주곡, 비발디, 갈룰리, 줄리아니 등의 기타 협주곡 등이 있는데 초기에는 제법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기타곡은 역시 열외 프로그램으로 지체 높은 악기군에 압도되어 뒷전으로 밀려버린 것이다. 내가 마우로 줄리아니(Mauro Juliani, 1781~1828)의 경쾌하고 유려하기 비할 데 없는 기타협주곡을 다시 듣게 된 것은 거의 삼십년만의 행사가 되었다. 이 협주곡은 로드리고의 ‘아란후에스 협주곡’에 밀려 거의 잊혀진 상태지만 파가니니 시대 이탈리아의 밝은 풍경을 배경으로 협주곡의 균형미를 고루 갖추고 있는 기타 곡의 걸작이 분명하다. 페페 로메로와 네빌 매리너 지휘의 아카데미 실내관현악단 협연인데 양자의 완벽한 하모니로 이 곡이 몇세기 전 작품임을 잊게 해준다.

페페 로메로의 ‘아란후에스 협주곡’도 물론 명연으로 손꼽힌다. 그가 부친 셀레도니오 로메로, 아들 둘과 함께 삼대에 걸친 기타가족이란 점도 흥미롭다. 그의 명성은 잘 알지만 그가 연주회 앵콜 곡으로 연주한 셀레도니오 작곡의 짧은 ‘환타지아’는 잠시 숨이 멎을만큼 놀라움을 주었다. 기타가 지닌 마술 같은 변신술, 그것을 여지없이 끌어내는 로메로의 현란한 기교는 하나의 극점을 보여줬다. 기타의 숨은 잠재력 한자락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기타 예술의 간결성과 현란하고 다채로운 표정들이 짧은 곡에서 한꺼번에 분출된 이름 그대로 ‘판타지’였다.

나를 기타 음악으로 이끈 연주가는 그런데 이탈리아도 스페인도 아닌, 아일랜드 출신 존 필리(John Feeley)라는 사람이다. 그는 바흐곡의 재발견으로 내게 감동을 주었다. 그에 관해서는 1984년 줄리아니 기타 경연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 말고 수업과정이나 기타 이력이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그가 모국을 중심으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을 거라는 추정만 할 뿐이다. 그는 바흐의 샤콘과 첼로모음곡 연주로 기타와 바흐 음악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다.

바흐 곡을 기타로 개척한 연주가는 스페인 기타의 대부격인 세고비아(작은 사진). 그는 바이올린 곡 파르티타(BWV 1004)의 샤콘과 무반주 첼로모음곡 녹음을 통해 바흐 음악과 기타의 관계를 높은 수준으로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초기에 그의 다소 과격한 편곡이 악성에 대한 모독이란 일부 비난을 받았다. 그 연주를 들어보면 기타의 관행인 사소한 트릭이 자주 등장하고 분위기도 한층 가벼워져 바흐곡 신봉자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킬 소지는 충분히 있다고 느꼈다. 가벼워진 분위기로 흥겨움은 살지만 기타의 장점인 폴리포니 효과를 충분히 살렸다고 볼 수도 없다. 연주도 진화하기 마련이다. 그 역할을 존 필리가 훌륭히 해낸 것이다.

엄격하고 고집스런 시골학교 교장선생님 타입의 존 필리는 연주에서는 섬세하고 부드럽게, 각각 다른 상황에서 적절하게 대응하는 변신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팔색조처럼 변화 많은 비브라토를 활용하여 다양한 음색을 창출한다. 저음 라인에서는 좀 더 부드럽고 섬세한 비브라토를 사용해 저음선의 딱딱한 저항을 완화시킨다.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지만 저음 선에서 손가락을 약간 옆으로 기울여 측면 접촉을 하고 있다. 그것은 편곡이지만 이 경우 거의 표가 나지 않는다.

부조니 편곡의 수많은 피아노 샤콘 연주를 들었는데 한번도 만족해 본 기억이 없다. 어딘지 빈 공간이 드러나고 공명이 없거나 빈약한 피아노 음 자체가 단절감만 노출시킨다. 폴리포니 효과와 공명을 최대한 살려낸 존 필리의 연주에서 그런 불평은 거의 사라진다. 샤콘이나 첼로모음곡이나 기다려보면 기타의 미덕이 발휘되는 절정의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첼로모음곡에서는 1번 쿠랑트에서 나는 그걸 느꼈다.

연주가 끝나고 그가 엷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그가 승리한 것을 본인도 청중도 함께 느꼈다. 그는 기타에서 최고의 바흐를 창출해냈다. 어느 댓글에서 “축하한다. 존 필리!”라는 걸 봤는데 나도 동감이었다. 다성과 공명에서 유리한 6현의 기타는 첼로 보다 더 유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존 필리의 연주는 바흐 음악이 여러 종의 악기에 그 악기의 장점을 훼손하지 않고 잘 적응한다는 점도 입증해 주었다. 페페 로메로가 보여준 스페인 식 ‘판타지’의 현란한 기교, 존 필리가 바흐곡을 통해 보여준 엄격하고 절도있는 미학, 나는 이것을 일단 기타 음악의 두 정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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