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91》 | <제79화 육사졸업생들>(144) 장창국 | 6군단 포병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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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병대가 재1한강교를 폭파하기전인 16일 상오3시30분 6군단 포병부대는 이미 당초의 개획대로 육군본부 광장에 집합해 있었다.
즉 혁명군 가운데 최초로 서울에 진주한 부대가 된것이다.
해병대가 육군참모총장의 지위권에 속해있지 않았고 통신이 쉽지않아 출동의 기밀이 탄로 되지 않은것처럼 장총장 주위에서는 6군단 포병부대가 출동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을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북방에 주둔했던 6군단포병은 아무런 저지나 충돌없이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당시 출동부대를 지휘한 사람은 군단포병사령관 문재준대령 (57·함남함흥5기)과 문대령을 중심으로 한 8,9기생이었다.
6군단 포병사령부가 혁명참가한 계기는 정군운동때부터 주동이 되었던 8기의 신윤창중령이 육본8기생의 분산 정책에 따라 6군단에 부임하면서 포방단장 문대령, 작전참모인 8기동기생 홍종철대령(작고)와 연계를 맺고 부터다.
물론 문대령은 이미 박소장과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5기동기생인 공수단장 박치옥대령, 6관구참모장 김재춘대령, 항공학교장 이원화대령과 횡적인 연락도 갖고 있었다한다.
6군단포병의 행동부대는 모두 5개 포병대대로 대대장에 신윤창중령(8기) 구홍춘중령 (종합) 백태하중령(9기) 정오경중령 (8특) 김인화중령(9기)에 다각전참모홍종철씨가 주력이었다.
본래 계획으로는 6군단이 서울진입을 할때는 이미 공수단을 혁명주력부대가 주요 목표물을 점령하고 있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기밀누설에 의한 출동부대의 혼란으로 6군단 포병이 선발대가 된것이다.
당시 문대령은 중앙청을 지나 육본으로 가는 본사와 헤어져 장면총리가 묵고있던 반도호텔앞을 거쳐 박소장과 만나기로 돼있던 남산야외음악당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반도호텔에 진출했어야할 공수단은 보이지 않았고 남산야외 음악당에도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날짜를 잘못 알고 미리 출동한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할 정도였고 한부하는 『우리가 속았다』 며 울어버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6군단 포병은 예정보다 l시간이상 늦게 상오4시가 지나서야 한강을 돌파한 해병대를 삼각지 로터리에서 극적으로 조우했다.
당시 한강을 넘은 해병대와 공수단은 시내에 진압군이 배치돼 있을까봐 시가전태세로 도보로 용산을 지나왔다.
이들은 6군단 포병들이 「시내는 조용하니 차를 타고 들어가라』 는 권유로 일제히 승차, 시내로 진입했다.
6군단의 활약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많은 공헌을 했으나 당시 참여했던 주역들중 구자춘·홍종철씨를 제외하고는 별로 빚을 못보았다.
혁명의 수행과 그 과실의 분배는 정비례하지 않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지도 모른다.
문대령은 혁명후 잠시 최고위원과 헌병감을 맡았다가 장도영중장일파반혁명사건과 관련, 예편이 됐었다. 한동안 유공감사·고문직을 맡았다 지금은 상도동에서 조그마한 시계공장을경영하고 있는것으로 안다.
김인화중령은 민정에 참여치 않고 군에 복귀해 준장으로 숨진, 70년초에 예편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정오경중령은 예편후 부동산협회 회장을 지냈다.
신윤창중령(57·평북전천)은 수도방위사 참모장을거쳐 많은 8기생이 준장으로 예편될때 같이 별을 달고 예편한 다음 공화당사무차장을 맡았다.
6대때는 전국구로, 7대때는 고양 파주에서 당선됐다. 끝까지 김종필씨계의 주류를 지켜오면서 3선개헌을 반대하다 정계에서 은퇴했다.
구자춘씨 (57 경북달성) 는 혁명후 곧 경찰에 투신, 충남 전남도경국장과 서울시경국장을 거쳐 제주·경북지사·수산청장·서울시장·내무장관까지 오른 행운을 가졌다. 10·26이후에는 쉬고있다.
홍종철씨(평북철산·작고)도 빛을 많이 본 케이스다.
5·16후 최고회의 문사위원장을 역임하고 신구창씨등과 함께 63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후 대통령경호실장(63년) 공보부장관 (64년)을 거쳐 문교장관까지 올랐다. 그는 청와대사정담당특별보좌관시절 낚시를 갔다가 유명을 달리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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