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정말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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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새해 들어서도 갑을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남양유업 대리점주에 대한 불공정행위로 촉발된 갑을 논란은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얼마 전엔 백화점 고객이 주차요원의 무릎을 꿇리고 폭언했다는 글이 인터넷을 달구며 사건 전모가 밝혀지기도 전에 사회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우월적 지위를 앞세워 ‘생사여탈권’을 쥔 듯 행동하는 갑의 횡포에 을의 눈물은 마를 줄 모른다.

 을에 대한 갑의 부당행위를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생사여탈권’이란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와 주고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이르는 것이므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으로 바루어야 한다. ‘생사여탈(生死與奪)’은 살고 죽는 것과 주고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 권리를 뜻하는 ‘권(權)’자를 붙이는 것은 어색하다. 살리고 죽이는 일과 주고 빼앗는 일이란 의미의 ‘생살여탈(生殺與奪)’에 권리란 말을 붙여야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지위나 힘이 있다는 뜻이 된다.

 ‘생살여탈권’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한비자가 “신하를 감독하는 노고를 꺼려 그들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고 관직을 주기도 빼앗기도 하는 권한을 중신에게 위임하는 군주는 결국 지배자의 지위를 잃게 된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선봉장으로 전쟁에 나서는 장수에게 국왕은 군사의 생사여탈권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는 상방검(尙方劍)을 내렸다” “저성과를 이유로 통상 해고가 가능하도록 한다는 것은 업무 평가의 주체인 사용자에게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주는 꼴이 아닌가”와 같이 사용해선 안 된다. 사느냐 죽느냐, 주느냐 빼앗느냐가 아니라 살리느냐 죽이느냐, 주느냐 빼앗느냐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므로 ‘생살여탈권’이라고 해야 바르다. ‘생사(生死)’라면 군사나 노동자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고 ‘생살(生殺)’이라면 장수나 사용자에게 그 권한이 있게 된다.

 죽이고 살릴 이의 이름을 적어 둔 명부를 ‘생사부’가 아니라 ‘생살부(살생부)’로 써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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