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자유당과 내각(3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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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무회의는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체로 알려져 있지만 내막은 그렇지도 못하다. 제헌헌법서부터 국무원은 대통령의 권한에 속한 중요 국책을 의결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거의 예이없이 대통령의 뜻에 대한 반대는 찾아볼수 없는 자문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지시나 듣는 정도>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사항도 다시 서면으로 대통령의 결재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그럴때는 그 서류를 내게 보내 검토하게했다. 이박사는 장관용 미국식명칭 그대로 Secretary로만 생각한 탓에 국무원의 독자적인 결의나 활동은 미미했다』라는 임철호씨의 경무대 비서시절의 회고가 이를 말해준다.
국무원 사무처장을 오래 지낸 신두영씨도 같은 견해다.
『국무회의는 1주일에 두번 열렸다. 한번은 중앙청에서 열렸고 또 한번은 경무대에서 열렸는데 경무대 국무회의 때는 국무회의가 끝나고 중앙청에 내려와서 다시 회의를 가졌다.
국무회의는 총리가 있을때는 총리가 주재했고 없을때는 수석국무의원이 했다.
경무대 국무회의는 이박사가 소파에 앉고 장관들은 책상없이 석줄로 의자를 놓고 앉아서 중요한 정책에대해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경무대 국무회의는 대통령에 대한 정무보고와 지시를 듣는 정도였고 정책에 대한 구체적 의안을 협의하거나 부처 상호간의 실무적 보고등은 중앙청 국무회의에서 이뤄졌다.』
따라서 국무회의란 사실상 유명무실했고 중요사안 의결은 사전에 이박사나 비서들을 통해 양해받은 뒤 중앙청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그래도 초기엔 국무위원들의 강한 사명감으로 뜨거운 논쟁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선근씨가 생전에 들려준 문교장관 시절의 회고.
『언젠가는 입법절차까지 마치고 실험단계에 들어간 교육자치제를 두고 시비가 재연됐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김정근씨와 경무대교육담당비서가 주동이 되어 교육자치제폐지안을 짜, 국무회의에서 제안설명을 했다. 김내무장관과 나사이에 옥신각신 말이 길어지자 국방·법무등이 내무장관 편을 들었다. 국무위원중엔 권력장관과 금력장관으로 눈에 안보이는 구분이 있어 내무·국방·법무가 권력장관이고, 재무·상공·농림이 금력장관이었다.

<「교육자치제」 논란>
문교부는 어느 축에도 끼지 못했고, 또 이런 부처장관 몇이 함께 덤벼도 내무장관 기세는 꺾을수없었다.
이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는 쉽게 생각할게 아니야>라며 좀더 숙의해 결과를 경무대로 올리라고 하고 회의를 마쳤다.
서너달 논의를 거듭했으나 내쪽에서 끝내 버티며 합의를 않자, 표결에 붙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국무회의에서 표결사례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의 경우 수석국무위원의 여론통합으로 끝나는게 보통이었다.
표결결과 기권이 6표나 되었고 폐지하자는 쪽이 한표 더 많았지만 과반수는 되지못했다.
이 결과를 경무대로 올렸더니 대통령이 금방 결재하지 않고 주무장관인 나를 불러 <이문교, 어떻게 생각하나.><전 반댑니다. 비록 표결엔 제가 졌지만 교육자치제폐지는 안됩니다.>
이대통령도 곧 결정하지 않았다. 한번은<각하, 교육구청문제는 각하 하시자는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이제 그 걱정이 내게로 왔어. 자네 신경쓰지 말게. 내가 판단할테니까.좀더 신중히 고려해서 결정하겠네.>
그래서 또다시 중앙청과 경무대로 번갈아 자리를 오가며 토의했다. 그때마다 권력장관들은 폐지하자는 주장을 폈고, 나혼자만 맞섰다. 이 문제는 결국 경무대국무회의에서 결말이 났다.

<초기엔 언론 존중>

<이 문제 국무회의에서 종결지어. 주무장관이 신념을 가지고 반대하는데 누가 간섭해. 그건 대통령도 못할 일이야.> 이대통령의 한마디로 숙제는 매듭지어지고, 폐기론을 제기한 장관과 비서관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은 때로 엉뚱한 일처리방식을 쓰기도 했다. 임문식씨의 농림시절의 회고.
『어느날 허정사회부장관이 서민주택 1만호건립계획을 세워 대통령의 결재를 받으려했다. 대통령은 돈 나가는건 질색이어서 결재를 미뤘다. 그러던 어느날 경무대에서 불러 갔더니 허사회부장관이 서민주택 얘기를 하고있는중이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대통령은 <이봐 농림장관, 서민주택 1만호를 짓겠다는데 절반은 농림에 짓게되어있어. 그러니 농림에서 맡게>라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서민주택은 농촌에 짓건 도시에 사회부의 일입니다>라고 했더니 대통령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이럴때는 <예, 알았읍니다>라고 해야한다. 그러면 그 절반은 사회부가 짓고 나머지는 짓지않는 걸로 된다. 대통령의 겨냥은 바로 그런 깃이었지만…. 또 이런일도 있었다.
어느날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고철문제를 꺼냈다. 당시 전쟁폐품으로 쌓여있는 고철을 일본으로 수출할때였다. <상공장관, 상공부에 고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나?><사실은 없읍니다.><그러니까 손해를 보지. 고철도 탱크폐품과 포탄폐품을 구분해서 팔아야해.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걸 하나…도대체 고철은 어디에 있어.><네, 역광장에 쌓여있읍니다.><그래. 그럼 고철수출은 교통부가 맡아서해.> 그러자 김석관교통장관이 <저희들은 바빠서 그 일을 맡을수 없읍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막무가내였다. <이봐, 역은 교통부 관할이지, 거기있는 나라재산은 교통부가 맡아서 하도록해.> 이래서 그로부터 근10개월동안 고철수출은 교통부가 맡아서했다.』
이대통령은 많은 일에 정통했다. 가령 아스팔트를 깔때 도로에 포키트가 생겨서는 안된다든가, 도시계획때는 condemnation즉 제각처분을 할수있어야 한다는등 관계국무위원이 잘 모르고 있는 일도 곧잘 지적했다. 비서들을 시켜 신문보도등 세론을 보고하게해 확인조사를 시키기도 했다. 언론의 활동에 대한 보장은 그의 신념이었던듯 하다. 전란중이던 50년 10월23일자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에게 보낸 지시문이 이를 말해준다. <신문검열에 관한 대통령지시- 신문에 게재되는것은 전시와 치안에 방해되는것 외에 자유권을 보호해주어야 되는것이니 「맥아더」장군도 언론이나 기사는 검열치않고 모든 편의를 도모해주는 것인데 정훈국에서는 전시검열이라는 명목으로 관계없는 것까지도 검열로 속박하니 신문을 신속히 잘 낼수없고 또…>그런 이대통령도 후기엔 점차 그가 통치해야할 현실과 거리가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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