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출판 외길 44년 … 반세기 채우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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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책 좀 그만 읽고 나가 놀아라."

이런 잔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소년이 있다. 광복 직후 책이 귀하던 시절, 좋아하는 책을 구하러 30리 길을 멀다 않고 걸어다니기도 예사였다. 소년은 성장해 문학을 공부했고(충남대 국문과 졸) 3년간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도 했다. 그러다 좋은 책을 만들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판사 편집자로 자리를 옮겼다. 올해로 출판 인생 44년째를 맞는 민병덕(71)씨 얘기다.

1961년 동아출판사에 입사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20여 년 동안 국내 여러 출판사를 거쳤다. 직함은 편집자였지만 교정.기획 등 출판 관련 업무 전반을 두루 해내야 했다. 그 바람에 납활자로 찍은 교정쇄를 수 없이 들여다보다가 시력이 나빠져 1년여 만에 안경을 쓰게 됐다. 직업병을 얻은 셈이다.

"그래도 일복은 있는 지 아직 눈이 쓸 만해요. 요즘도 하루 최대 10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하지만 견딜 정도니까요."

민씨는 82년 현업을 떠나 혜전대(충남 홍성)에 국내 최초로 출판학과를 개설하고 학과장으로 부임했다. 99년 이 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뒤 올해 6월까지 성결대 겸임교수로 강단에 섰다. 나이를 이유로 출판 현장에 이어 교직마저 떠난 그가 컴퓨터 앞에서 10시간씩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일까.

"책을 만들고 있어요.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아직도 많거든요.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네요."

그의 전공인 편집은 물론이고 자료 수집과 집필, 책 속에 삽입할 사진 촬영과 표지 디자인까지 모두 스스로 해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1인 출판'시스템을 통해 민씨는 지난해 8월 '독서 로드맵'을 펴냈고 최근 '논술 로드맵'을 출간했다.

"청소년들에게 책 읽기와 글 쓰기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내가 자랄 때와 달리 읽을 거리가 넘쳐나다 보니 오히려 독서를 외면하는 것 같아서요. 고전 위주로 좋은 책을 골라 읽고, 그걸 자양분 삼아 글을 쓰는 능력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될 책을 만들려고 애를 써봤습니다."

"힘들지 않으시냐"고 했더니 민씨는 손사래를 쳤다.

"웬걸요. 아직 만들고 싶은 책이 많아요. 화술과 편집의 길잡이가 될 책도 내고 싶고, 한국 출판계의 역사도 정리하고 싶고…."

한국출판학회를 창설해 96~99년 회장을 지내고 현재 고문직을 맡고 있는 민씨는 "좋은 책을 계속 출간해 출판 인생 50년을 채우고 싶은데 욕심이 너무 큰 게 아닌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글.사진=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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