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 칼럼

예상 뒤엎은 유럽 유권자의 표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기민당 당수는 7월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 메르켈은 야당 지도자 자격으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러나 메르켈의 파리 방문 목적은 따로 있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내무장관이 주선한 '언론과의 만남'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사르코지는 2007년 임기가 끝나는 시라크 대통령의 후계자로 부상하고 있다. 활동적인 사르코지는 대담하게도 시라크 대통령과 맞서 왔다. 은퇴한 목사의 딸인 메르켈은 과학자 출신 정치가다. 그들은 겉보기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다.

그러나 이 커플의 회동은 언론과 정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메르켈과 사르코지 모두 선거에서 승리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함께 새로운 유럽 '삼두마차'로 부상하게 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들 유럽 정치 지도자 셋은 모두 자유시장경제를 중시하고 친미적인 성향을 보여 왔다.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디 타게스차이퉁은 당시 "메르켈과 사르코지는 유럽의 새로운 얼굴"이라고 소개했다. 신문은 "유럽연합(EU) 헌법 부결 파동 이후 시라크 대통령-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이끄는 기존 구도에 변혁이 일고 있다"고 썼다.

메르켈의 기민.기사당 연합은 '파리-베를린-모스크바 축'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며 베를린은 다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서양 축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메르켈과 사르코지가 파리에서 화려한 이벤트를 벌이고 있을 때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검증받지 않은 도미니크 드빌팽이 프랑스 총리가 됐다. 시라크 대통령은 이후 한 달 만에 병원에 입원했다. 곧 퇴원하기는 했지만 그의 정치적 미래에는 불확실성이 드리워졌다.

외무장관을 지낸 빌팽 총리는 시라크를 대신해 세계 정상급 지도자 170명이 한자리에 모인 뉴욕 유엔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뜻하지 않게 빌팽이 국제무대에 각광을 받으며 등장한 것이다. 이제 사르코지는 차기 프랑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빌팽이라는 산을 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지난달 독일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가 점쳐졌던 메르켈의 기민.기사당 연합은 가까스로 라이벌 사민당에 3석 앞서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메르켈은 사상 첫 여성 독일 총리가 되기 위해 힘겨운 연정협상을 벌이고 있다. 총리가 된다 하더라도 메르켈은 대대적인 경제개혁에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것이 바로 독일 유권자들의 선택이었다. 올 초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EU 헌법 비준안이 부결됐을 때도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전문가들은 유권자들이 좀 더 현명하게 판단하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독일 유권자들은 구조개혁이나 복지.연금 혜택 축소 같은 희생을 견뎌내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신자유주의 이론이 확산하면서 세계의 기업가들과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성공의 비결이 드디어 발견됐다고 생각했다. 사회정의나 공동책임 같은 종전의 개념들은 이윤과 주식시장에서의 성과로 측정되는 기업 활동에 장애물이 될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낼수록 사람들은 더 행복해진다. 규제 완화가 세계화와 결합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롭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더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기 위해 그동안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임금이 기준생계비 아래로 떨어지게 된 것이냐고 유권자들은 반문하고 있다. 지금 독일과 프랑스 유권자들은 30년 이상 희생을 감수해 온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EU 헌법 비준 투표에서 유권자들의 반발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전문가들의 견해에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한경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