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자유당과 내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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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유당 시대의 인사난맥 원인의 하나였던 의원의 인사청탁도 국회의원들에게는 부담이었다고 신두영씨는 회고했다.
『자유당때 의원들은 선거구민들의 청탁에 몹시 시달렸고 장관들은 의원들의 부탁에 시달렸다. 선거구민들은 의원들에게 청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의원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무능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다 보니 의원들은 장관들에게 인사압력을 많이 넣었다.
군수·도지사의 인사 부탁은 귀찮을 정도였다.
전남 고흥출신 구흥남국회의원이 어느날 나를 찾아와서 고흥군의 교육감 발령이 안나고 있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지역구 압력 못 이겨>
그때 다른 군은 이미 2개월전 교육감 발령이 났는데 고흥군만 인사발령에서 빠져 있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서류가 다른 대로 잘못 가 있어서 발령이 나지 않고 있었다. 사무착오로 생긴 일이었다. 그래서 즉시 인사발령을 내고 그 사실을 고흥에 있는 구의원에게 전보를 쳐서 알려줬다.
그런데 구의원은 고향에서 <다른군은 전부 교육감 발령이 났는데 고흥만 빠졌으니 우리 국회의원은 병신이다>라는 소문이 퍼져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고 전보가 도착한 날도 구의원이 방에 앉아 있는 동안 마루에서는 선거구민들이 앉아 구의원에게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구의원을 헐뜯고 있을 때였다. 전보가 도착하자 선거구민들은 오해를 풀고 구의원에게 사과했다는 것이었다. 구의원은 그 길로 서울에 올라와 나를 찾아와서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러한 사정을 설명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국회와 정부의 잘못도 많았지만 선거구민들의 정치의식은 지극히 낮았다.
나도 가끔 인사 부탁을 받았다. 국무원 사무국에서 일할 때였다. 당시 의원들의 청탁이 하도 심할 때라 <국회의원이 추천하면 군인도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있고 시험에 합격하면 군에서 제대한다>는 방침까지 세워야 할 정도였다. 특히 군관계 인사 청탁이 많을 때였다.
이렇게 해서 공무원시험을 보는데 나에게도 84명을 합격시켜달라는 의원들의 부탁이 왔다.
궁여지책 끝에 의원들의 추천 없는 사람도 시험을 볼 수 있게 하고는 성적순대로 사람을 뽑았다. 합격자들에게는 시험성적까지 공개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시험에서 의원들의 추천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떨어지고 추천 없이 시험에 응시한 사람들이 합격했다. 내가 부탁 받은 시민 중에서도 76명이 떨어져서 76통의 편지를 써서 떨어진 이유를 의원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나중에 반도호텔파티에 참석했다가 나에게 부탁을 했던 의원들에게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더니 <오히려 잘됐다. 실력대로 시험을 치렀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돼서 집에서 숙식을 하며 부탁을 하던 선거구민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편하게 됐다>며 반가와 했다.』
초대문교장관을 지낸 안호상씨는 <사람을 곶감 빼먹듯 빼먹고 싫으면 버리니 누가 남아나겠느냐>는 조병왕의 말을 인용, 이박사의「사람 씀」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성적 공개로 설득>
그의 견해는「해외독립투사들이 그렇듯이 자기와 노선이 조금만 틀려도 용납 않는 그런 성격이 나타났고 그 점에서 이박사도 지사이긴 했으나 행정가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이박사의 각료 교체는 각료들 쪽에 그 책임이 있던 때도 더 많았다. 그 사례들.
농림장관이던 신중목씨의 회고.「농림장관 시절 한번은 군인들이 트럭을 민간에 대여해 주어 산의 나무를 마구 베어간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에게 <각하, 드릴말씀이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림행정은 농림부 소관이지만 농림부에서 못 맡겠습니다. 국방부소관으로 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이 <무슨 소리냐>고 되물어 <군인들이 차를 갖고 다니며 나무를 벗겨 먹는데 민간인으로서는 막을 수가 없읍니다>라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국방장관, 어찌된 일이야>라고 화살을 돌리자 신태영국방장관은 <말미를 주면 숙청 하겠읍니다>라고 했다.
국방장관의 약속 기일이 되어 국무회의에서 내가<장관, 도벌 막는 다는 것 어떻게 됐읍니까>라고 물었다.
당시만 해도 국방장관 말이 군대에 제대로 먹혀 들어 가지 않던 때라 <아직 정리가 안됐읍니다>라는 얘기였다.
그러자 대통령은 국방장관 당신이 자동차 대여 해준 돈을 받아썼느냐고 나무라며 국방장관 자격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그런 신농림도 역시 각내의 불화로 각료직을 물러났다. 그의 회임에 관한 얘기.

<내각 불화도 잦아>
「농촌의 잡부금을 대학생들을 시켜 조사 시킨 뒤 국무회의에서 4번이나 금지안을 상정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4번째에도 통과가 안되자 그 자리에서 백두진총리에게 사표를 던지며 <국무위원네놈들, 백성도 모르는 네놈들 하고 정치 못하겠다>고 소리치고 나와 버렸다.
나는 잡부금 근절은 사회운동을 통해서 실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음날 아침 10시에 각 신문사 편집국장을 불러 자료를 나눠준 뒤 11시 고향 거창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기차 속에서 이북방송을 들으니 어느새 남한동포들이 각종 잡부금에 수탈 된다는 방송이 나왔다.
이것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자 이박사는 펄펄뛰며 <국무회의에서 통과가 안되면 대통령을 통해 통과시켜야지 사표만 내면 그만이냐>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고 결국은 장관자리를 물러났다.』
경무대 비서였던 황규면씨의 회고.「6대 내무장관이던 이순용씨는 이박사 앞에서는 꼭<소생이…>하고 말을 했다. 이장관은 이박사와의 미국에서의 친분관계로 장관이 되었는데 장관이 되면서 미국시민권을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장관을 이박사가 불러 <전임 조병왕장관은 판공비를 너무 해프게 쓴 것이 흠이야. 자네는 나와 특별히 가까우니 그런 소문이 안나도록 각별히 조심하게>라고 주의를 줬다.
이순용씨가 장관에 취임하자 치안국장이던 김태선씨가 당시 돈 30만원을 판공비라고 가져 왔다. 이장관은 이박사에게 주의를 들은 터라 고스란히 경무대로 가져가 보고를 했다.
이 일로 장관과 치안국장 사이가 벌어져 티격태격한다는 소리가 이박사에게까지 들려 이박사가 둘을 불러 묻자 이박사 앞에서는 서로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계속 투닥거리는 것이 다시 이박사 귀에 들어가 결국 김태선씨를 서울시장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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