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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비즈] 세탁기 기술독립 '30년 집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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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LG전자 세탁기사업부의 조성진(49) 상무는 1976년에 입사한 뒤 사업부장에 오른 지난해까지 29년간 세탁기 개발만 담당했다. 그가 출원한 특허는 39건에 이른다. 우수 신기술 제품 개발자로 뽑혀 '장영실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조 상무는 "무엇보다도 '일본으로부터의 기술독립'이란 꿈을 이룬 게 제일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가 입사했던 70년대 LG전자(옛 금성사)엔 연구실 대신 설계실만 있었다. 기술이 없어 외국의 설계 도면을 가져다 조금 고치는 게 전부였다. 세탁기는 새 제품을 만들려면 먼저 일본의 히타치에 도움을 청했다. 조 상무는 "일본 기술자를 불러다 경주관광 접대를 하며 기술을 배웠다. 지금도 불국사.첨성대 등의 연혁을 외운다"고 회상했다.

93년 히타치가 플라스틱 대신 스테인리스로 만든 세탁 통을 개발했다. 조 상무는 기술을 얻으려고 두 번 일본의 히타치 연구실을 방문했지만 모두 문전박대를 당했다. 오기가 난 조 상무는 독자 개발에 들어갔다. 1년 반 뒤 더 우수한 스테인리스 세탁 통을 들고 히타치로 찾아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을 얻은 조 상무는 94년 '일본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독자적인 기술로 일본을 뛰어 넘든지 새 영역을 찾아 일본을 빗겨나가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연구개발 인력을 따로 떼 선행개발팀을 만들어 미래 트렌드에 맞춘 기술을 연구하게 했다. 결론은 '유럽식 드럼 세탁기 개발만이 살 길'이었다. 물을 적게 쓰면서도 옷감이 덜 상하고 건조가 함께 돼 시장의 흐름을 잡을 수 있다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당시 보쉬.지멘스.밀레 등 유럽 업체들이 드럼 세탁기 시장을 장악했다. 그는 해법을 대용량에서 찾았다. 유럽의 드럼 세탁기는 6kg 용량이 한계였다. 세탁기의 모터가 회전수 조절이 안 돼 클러치와 벨트가 들어갈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 상무는 회전수 조절이 가능한 '다이렉트 드라이브(DD) 모터'를 개발했다. 98년 더 작은 크기에 더 많은 용량이 가능한 '터보 드럼 세탁기'를 내놓았다.

조 상무는 "기술 독립한 이때 감격해 팀원들이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 말했다. 7kg가 넘는 드럼 세탁기를 유럽에 수출하자 보쉬가 과장 광고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독일 법원은 LG전자의 손을 들어줬다. 대용량 드럼식 세탁기인 LG전자의 '트롬'은 전세계 시장에서 프리미엄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자 히타치가 조 상무를 찾아와 완성품을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LG전자 측은 개발비까지 얹어 비싸게 팔았다. 콧대 높던 보쉬도 DD모터를 공급해달라고 부탁했다.

"부가가치를 더할 수 있다면 백색 가전은 사양사업이 아닙니다." 조 상무는 "선진국뿐만 아니라 앞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도 자신 있다"고 말했다.

창원=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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