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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30 일터에서

감춰진 매력 재발견 내 손은 '매직 터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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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기껏 분장사랑 사귀니? … 어디 여자가 없어서 분장사야?"

최근 한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와 논란이 됐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전화로 "열 받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친구들 덕분에 그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러나 정작 나는 듣고도 별 감정이 없었다. 기성세대에서 '분장사'는 그런 이미지인 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의 나의 자부심은 크기 때문이다.

최고로 인정받는 선배들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느덧 경력 10년차가 됐다. 이쪽 동네에선 자신있게 명함을 내밀 수 있을 세월이 지났다. 송윤아.강혜정.이나영.김하늘.엄지원.하지원.김효진.정혜영 등의 내로라하는 인기 연예인이 우리집 단골이다. 특히 나영이.혜정이 같은 경우는 잡지 모델로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 같이 작업을 해온 터라 이젠 언니.동생 같은 사이가 됐다.

내가 하는 일은 모델.연예인뿐 아니라 웨딩 촬영 등 특별한 이벤트를 앞둔 일반인들을 한마디로 '변신'시켜 주는 것이다. 각자의 감춰진 개성을 발견해 이를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드는 작업이다. 화장을 하고 머리를 손질하며 핀.장식 등의 각종 소품을 이용하는 게 모두 이를 위한 수단이다. 매번 다른 내용의 광고.드라마.영화를 찍고 다른 느낌의 화보를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나 모델의 얼굴을 그때그때 컨셉트에 맞게 변신시켜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친구들은 아직도 "연예인을 많이 만나니 좋겠다"며 부러워한다. "사인 좀 받아달라"는 민원도 꾸준히 들어온다. 처음엔 "대학까지 나온 애가 미장원 일 하느냐"며 말리던 녀석들이었지만 이젠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간혹 대학으로 강의를 나가면 '화려한 직업'이란 환상에 빠져 있는 어린 학생들을 종종 본다. 하긴 톱 클래스 연예인들과 허물없이 매일 생활하니 그래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이 바닥에서 제대로 인정받으면 매년 억대를 뛰어넘는 수입을 올린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으니 젊은이들 사이에선 선망의 대상이 될 법도 하다.

그러나 어느 분야든 그러하듯이 그 '제대로 인정받는' 길은 너무도 좁다. 시작부터 험난하기 짝이 없다. 나 역시 대학 졸업 후 기존 메이크업 숍에 들어가 몇 달 동안 아예 무보수로 일을 배웠다. 첫 월급은 교통비로 10만원을 받은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메이크업 일에는 손도 못 대고 은행 심부름, 청소가 내 몫이었다. 선생님들 출근하기 전에 숍에 나와 있어야 하고, 모두 퇴근할 때까지는 꼼짝도 못하니, 새벽별 보는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 어느 정도 지나 처음으로 정식 모델 메이크업을 하게 됐는데 벅차오르는 기쁨도 잠시, 곧 이어 열린 회의에서 선생님과 선배들의 질책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매서운 혼뜨검이었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보람에 뿌듯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내 이름을 건 숍을 하나 차리고 정착했지만 업무 강도는 여전히 만만치 않다. 이번 연휴기간에도 추석 당일을 빼곤 전부 촬영장에서 보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한다. 분장이 늦어 일 진행이 꼬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영화 촬영은 보통 새벽부터 시작하니 촬영기간 내내 제대로 잠자기도 어렵다.

때로는 내가 왜 이토록 험한 길에 들어섰는지 되물어 본다. 기성세대의 인식마저 좋지 않은 이 일에 왜 빠졌는지 하고. 그래도 그동안 한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나를 통해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에도 숍에서 웨딩 촬영을 앞둔 한 여성의 메이크업을 해준 적이 있다. 볼이 약간 통통한 편이지만 눈이 예쁜 이 예비신부의 눈매를 살려줬더니 "이게 정말 나 맞느냐"며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연예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언론에서 '그 역할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아무개의 연기변신이 성공적이었다'는 기사를 보면 왠지 메이크업을 잘한 내 공인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런 보람들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엔 슈에무라나 바비브라운처럼 평생 명성을 떨치며 활동하는 세계적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없다. 다만 최근 들어 한류 열풍을 타고 우리의 메이크업 솜씨 역시 아시아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추세다. 언젠가는 할리우드 배우, 세계적인 모델들이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을 찾아오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김활란'이란 이름이 딱 박혀 있을 그날을 꿈꿔 본다.

김활란 (35.메이크업숍 '뮤제'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