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난초그림위조해 팔아 독립군 자금으로 썼다〃관련자 유족들이 비화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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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제 무단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l910년대, 독립군자금을 마련키위해 석파 흥선대원군의 그림을 대량 위작·판매한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더우기 이독립운동비화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유명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형과 백서 유상태, 그리고 서예가 우당 유창환등 3인이었다는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이같은 사실은 그동안 비밀에 붙여오던 이들의 후손들이 이들 독립운동비사로 공개하고 지금까지 보존해오던 위작 당시 석파의 낙관을 함께 내놓음으로써 밝혀진 것.
우당의 아들 유치웅씨(84·명지대이사)와 우당의 아들 이규창씨(71·독립운동가)는 당시의 삼엄했던 감시속에서 의형제와도 같이 친하게 지내던 3인이 펼쳤던 지하공작에 대해 소상히 증언해줬다.
난을 치고 전각(전각)하는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우당은 석파의 난과 낙관을 맡았고, 보악으로 불릴 만큼 당대 최대의명성을 날리던 서예가 우당은 석파체의 화제를 맡아 작품을 만들었으며, 판매는 걸걸한 성품에의리와 모험심이 강한 백은이 맡았다는 것.
이렇게해서 판수량은 정확치 앓으나 1913년부더 3·1운동 직전까지 틈틈이 행해졌으며 판가격은 한점에 1백원 내지 2백원씩이었다.
당시 1백원이면 논 50마지기값은 됐다고한다.
이렇게해서 모든 돈은 만주의 독립군자격으로 보내졌다고 이들은 증언하고 있다.
1910넌 국권을 빼앗기자 바로 일가를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했던 우당이 독립군 양성의 기지를 닦고 신오무관학교를 세운후 독립군자금 관계로 밀입국한것은 1913년초.
당시 국내는 헌변경찰통치가 극에 이른 가운데 「데라우찌」(사내정의) 총독 암살음모를 구실로 6백여명의 애국지사 검거선풍을 일으켰던 백오인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꽁꽁얼어붙은 상황이었다.
뜻대로 군자금이 모아지지않자 평소 독립운동에 음양으로 관여하면서 의기투합하던 3인은 묘안을 짜내 부호들에게 접근했던것.
우선 우당과 우당의 재주를 합하면 대원군의 집품과 다를바없는 그림을 만들어낼수 있는데다 당시 본격적인 감정을 할만한 사회적 분위기도 아니었으며 특히 우당과 대원군이 인척관계란 점도 판매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후손들은 말하고있다.
1919년 우당은 다시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다가 1932년 일경에 체포, 대연경찰서에서 고문으로 순국했고, 국내에서 계속 활동했던 우당은 특히 뛰어난 예술적 업적을 남겨 국립현대미술관은 76년 이례적으로 그를 위한 추모 초대전을 연바 있다.
백은은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와 옥바라지에 남다른 헌신을 했으며 이승만탈옥사건에도 간여했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석파 대원군의 난 그림은 상당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이 독립운동비화와 세 독립운동가의 비원도 또다른 석파의난속에 실려 함께 유전하고 있다.<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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