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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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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얘기일지도 모른다.
'향후 17년의 21세기. 바로 그무렵에 사라져 버릴 말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일본의 한 유명 출판사가 일본인을 상대로 그런말을 공모했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말들 중엔 이런 것이 있었다.

<국철> 우리나라로 치면 국도. 만년 적자를 면치 못해 21세기가 되면 민영화가 불가피하며, 따라서 「국철」이란 말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경노석>일본에선 은원의 노인들을 위한 자리라는 뜻으로 「실버 시트」라고 한다.
21세기가 되면 노맹장시대로, 오히려 젊은이들이 약골이다.
「경노석」을 「젊은이석」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라는 풍자아닌 풍자.

<제철이다> 비닐 하우스 재배나 냉동 보존 등의 기술혁신은 제철이 따로 없이 싱싱한 야채나 생선을 공급할 수 있게 한다.
철 지난 야채나 때맞춘 생선 따위의 말은 필요없다.

<신간선> 일본이 자랑하는 초특급열차선. 그러나 더 빠른 열차시대가 올 것이다.
필경 우리나라 경부선 「고속」도로의 이름도 그때쯤엔 바꾸어야할 것 같다.
지금도 벌써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동차들이 달려 완행도로가 되어가고 있다.
서울∼부산을 5시간씩이나 가는 열차도 마찬가지다.

<은사> 지금의 청소년들이 21세기에 선생이 되면 자신들을 감히「은사」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물론 일본의 얘기지만, 우리 귀엔 그나라 얘기만으로 들리지 않는다.

<초야> 초야와 순결은 아직도 동의어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등식이 부등식의 관행으로 바뀌면 「초야」나 「밀월」과 같은 말은 때묻은 소설이나 시집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느 혹성의 풍속인가 할지도 모른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 1999년은 건재할 것이다.
따라서 그해에 인류 최후의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대들보> 한 집안의 대들보는 아버지. 21세기에도 과연 그런 말이 통할만큼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있을까. 일본인들은 차라리 대들보라는 말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요즘은 지붕속에도 대들보가 없다. 슬라브 집이나 아파트에 사는 아들에게 대들보를 설명할 말은 사전에나 있을 뿐이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우리도 21세기에 사라질 어휘들 가운데 보태고 싶은 말들이 있다.
아파트<투기>, <복>부인, 대학의<강제탈락>, 무슨<자율화>, 무슨<의무화>, <강력>수사, <전면>수사, 사회<정화>, <특>진….
그보다도 우리의 언어관습이 문제다.
「관리」하면 부조리, 「재벌」하면 탐욕, 「택시운전사」하면 화난 얼굴이 연상되는, 마치 언어의 조건반사와도 같은 연상들. 이것은 10년 화일로 우리의 언어들을 왜곡시키고, 더럽힌 모형이다.
모든 말이 순수한 의미를 지킬 수 있는 사회. 21세기의 언어를 깨끗이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는 할 일이 많다.
17년은 결코 긴 시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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