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여론조사 통해 미리 본 2007년 대선 어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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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87년의 13대 대선에서는 '평화적 정권 교체'가, 92년의 14대 대선에서는 '군사정권 종식'이란 구호가 승리했다. 97년의 15대 대선에서는 '최초의 정권 교체'가,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낡은 정치 청산' '변화와 개혁'이 상대적 우위를 차지했다. 물론 네 번의 대선 모두 지역구도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정신과 국민의 여망을 담은 구호와 어젠다가 그 기본 틀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다면 선거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여론조사의 흐름에서 차기 대선의 어젠다를 짚어본다.

산업화 세력은 국가적 절대과제인 빈곤 극복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우리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구호가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보듯 산업화의 대부분의 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거둬갔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의 호황은 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 정치세력은 자신들이 주도한 경제성장의 열매를 따먹는 데 너무 오래 안주했다. 시민사회의 성숙을 외면했고, 영남 중심의 지역주의 정치에 만족했다. 그러는 동안 각종 부정부패와 지역 편중 인사, 병역 기피 등으로 도덕성을 잃어갔다. 정치적 기반이 한계에 부닥치자 YS 등 일부 민주화 세력과 제휴를 시도했으나 결국 문민정부 후반 '외환 위기'를 맞으면서 민주화 정치세력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산업화 세력의 자멸 속에서 1997년 집권한 민주화 세력은 환란 위기를 넘겼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남북 협력과 화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후반 들어 경기가 침체되고 대통령의 측근과 아들들의 비리가 불거지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그러나 산업화 세력은 '수도 이전'공약을 매개로 한 호남.충청 지역연합과, 점점 커져가는 탈산업화 세대를 기반으로 한 세대 대결을 넘어서지 못한 채 16대 대선에서 민주화 세력에 재차 패배한다. 실제로 2003년 12월 16대 대선 불법 대선자금 문제를 둘러싸고 한나라당 내부에서 제기된 '당 해체' 주장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51.2%의 국민이 공감했으며 한나라당은 2004년 총선에서 호남은 물론 충청권에서도 거의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한편 민주화 세력은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17대 총선에서 극적으로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세력을 확장했으나 총선 직후부터 지지도는 지속적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또 여당은 민주화 세력 내부에서의 리더십과 정체성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9월 초 조사에서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20.6%, 그리고 여당 지지도는 16.3%로 바닥권을 헤매고 있다. 앞으로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이 20% 안팎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국민의 불안과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현재의 정당구도가 바뀌지 않는 한 차기 대선은 양대 세력의 3차 대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2007년 대선은 지난 10년(YS정권을 포함할 경우 15년)간 집권한 민주화 세력에 대한 중간평가와 산업화 세력에 대한 재평가의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된다.

차기 정부의 성향을 묻는 여론조사를 보면 '개혁진보'노선에 대한 선호가 50~60%, '안정보수' 노선의 선호도는 40% 안팎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DJ정권 말인 2002년 4월 여론조사에서 선호하는 차기 대통령 후보의 이념성향을 '개혁진보'라고 응답한 비율이 71%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줄어들고 있고, 갈수록 그 격차도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향후 경제 및 사회 전반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커질 경우 '민주화 세력 무능론'이 먹혀들 수 있는 흐름이기도 하다. 한나라당도 아직은 부패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차기 대선 이후에는 패배한 쪽을 중심으로 분열이 일어나고, 이는 승리한 쪽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거대한 가치 대결의 축이 약화하면서 정계가 재편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2007년 대선은 지난 40년간 한국 정치의 양대 세력을 형성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마지막 대결일 수 있다.

김현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세대 대결과 인터넷] 지난 대선서 위력…부모 세대도 컴맹 탈출 "차기 주목"

최근 한국 정치는 노선으로는 민주화 가치와 산업화 가치의 대결이지만, 외형의 큰 틀은 지역구도와 세대대결이다. 이는 지역대결을 중심으로 한 선거가 세대 중심의 선거로 바뀌어 간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선상의 현상이기도 하다.

세대대결 현상은 행태적으로는 이른바 386세대를 기점으로 나타난다. 즉 19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가 민주화 가치를 중심으로 산업화 세력에 저항하면서 그동안 우리 사회의 주류였던 산업화 가치에 정면 도전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또 386 이후의 이른바 475세대는 386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념적 방향성은 약하지만 합리주의에 기반해 권위주의나 냉전주의, 성장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탈산업화 가치'를 모색하고 있다.

산업화 가치에 대항하거나 탈피한 새로운 세대가 사회의 중심권으로 진입하면서 그동안 한국 정치에 있어 근본적 대결구도였던 지역주의에 근거한 정치성향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대체로 민주화 가치에 동조하는 개혁진보적 경향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50대 이상의 산업화 중심세대와 정면 대립하는 양상을 띤다.

지난 대선과 총선 등 주요 선거에서 이들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자신 또는 부모의 출신 지역과 관계없이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대체로 현재의 여당이나 진보세력인 민노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주의 성향이 더 강화된 이들을 묶어준 것은 바로 인터넷이다. 이전의 정치가 지역 중심의 인적 조직에 기반을 뒀다면,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상호 소통하면서 공간적 한계를 극복했다. 또 인위적으로 조직을 충원하던 전통적 정당과 달리 이슈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인터넷 중심의 네트워크가 현실 정치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이 바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원한 '노사모'였다.

인터넷 언론은 고속.고용량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지면서 제도언론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대중이 스스로 특정 이슈를 쟁점화하고 또 여론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여론은 급속히 달구어지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냉각되는 한계도 갖고 있다.

산업화 세력도 뒤늦게 인터넷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이버 공간에 뛰어들었다. 차기 대선에서는 사이버 전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게 틀림없다.

[차기 대선, 무엇이 이슈 될까] 지역 대결 → 세대 대결 → ?

최근 한국 정치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결 구도이며, 나아가 두 세력의 이념적 가치 대결의 측면이 강하다. '산업화 가치'는 군사정권 하에서 이른바 '개발독재'를 떠받치던 정치논리이자, 대중적 신념체계였다.

전체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공동체 중심주의', 북한을 국가안보 위협의 주적으로 보는 '반공주의', 고속성장을 통해 번영을 누리는 '성장 중심주의'가 주축이다. '친미'는 산업화가 경제.안보 면에서 미국과의 절대적 협력관계가 필수적이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산업화 가치는 보수의 기반이 됐다.

산업화 세력의 지역기반은 영남이었다. 이 시기 국가 엘리트의 충원과 산업화가 영남 중심으로 이뤄졌다. 지역 간 격차가 깊어지면서 호남 소외론이 발생했다.

'민주화 가치'는 산업화 세력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하며 민주화 투쟁을 했던 세력의 이념기반이다. 인권과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민주주의', 민족화합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남북협력', 고속성장 과정에서 빚어진 빈부격차 심화를 극복하려는 '격차 해소와 복지'를 내용으로 한다.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경험하면서 호남이 그 지역적 기반이 됐고, 진보의 정치성향으로 자리잡았다.

제도정치권의 민주화 세력은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민주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평민당으로 나뉘면서 지역을 축으로 본격적으로 분열한다. 90년 부산.경남 출신인 YS는 3당합당을 통해 산업화 세력과 손잡고 9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14대 대선에서 패배한 DJ는 15대 대선에서 당선됐다.

15대 대선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범민주화 세력의 결집이다. 다음은 호남과 충청의 지역연대가 이뤄졌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 및 그 이후 세대가 사회의 중심부에 진입하면서 산업화 세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세대 대결' 현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한국 정치의 기본지형을 형성해 민주화 세력은 16대 대선에서도 동서 대립과 세대 대결 구도를 기반으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호남 민주화 세력 중심의 정당에서 비주류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후 구주류인 호남 세력과 결별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그렇다면 다음 17대 대선은 어떻게 진행될까. 현재 한나라당은 산업화 세력을, 열린우리당은 민주화 세력을 대변하고 있다. 이런 정당구도가 지속된다면 양대 세력이 재격돌할 수밖에 없다. 다만 최근 충청권의 여당에 대한 지지 감소로 동서 대립구도가 약화되고, 정치권의 민주화 세력도 열린우리당과 진보 색채가 뚜렷한 민노당, 호남 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으로 비교적 큰 조각으로 나누어진 만큼 15,16대 대선과는 다른 흐름이 나타날 수도 있다.

[대선 어젠다…북한과 미국]
'남북 화해 협력' 흐름 미국과 동맹관계에 변수

민족이냐 동맹이냐.

북한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북한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는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어느 정도의 강도로 가져갈 것이냐 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산업화 세력은 '반공친미'노선을 견지해 왔다. 현재도 보수계층의 이념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화해와 협력'이라는 가치가 세를 얻으면서 북한이 '주적'이 아닌 '평화통일의 동반자'라는 여론이 56.7%(2004년 7월 15일)에 이르고, '남북 관계가 한.미 관계보다 중요하다'는 응답이 꾸준히 50%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공친미주의'가 '다수의 가치'에서 '소수의 가치'로 지위가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은 국민의 탈냉전 및 평화에 대한 요구와 북한에 대한 체제 우월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반미친북'으로 규정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지난해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이 있을 때 여론조사 결과가 그 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유지라는 가치가 체제를 넘어선 남북 통합의 가치에 우위를 보이는 측면이 있다. 2004년 7월 29일 조사에 따르면 '국가안보 차원에서 유지해야 한다'가 56.8%,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 법안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가 32.9%, 무응답 또는 모른다는 응답이 10.3%였다.

북핵 문제가 타결되면 되는 대로, 결렬되면 또 그대로 대북 문제는 차기 대선에서도 영향력을 떨칠 것이다. 진보 세력은 단순히 헌법 제4조 안에서의 통일을 위한 정책적 노력이라는 차원을 벗어날 수도 있다. 성역으로 간주돼온 '체제'문제까지 건드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에 따른 유엔사 해체 및 주한미군의 지위 문제, 국가보안법 개폐 및 나아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헌법 제3조의 개정 문제 등은 대단히 민감한 이슈다. 전통적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동맹 강도, 독립성 수준도 논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문제 여론 흐름]민심은 성장.분배 모두를 원하는데 …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마지막 가치대결 축은 '성장과 분배'란 문제다. 그동안 주요 선거에서 이 문제가 이슈로 제기되기는 했지만 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이는 민주화 세력 집권 이후에도 대체로 경제정책에서 성장중심주의가 유지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우리 경제가 '경기회복을 위한 성장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응답이 67.9%로, '양극화 해결을 위한 분배 중심' 노선보다 높게 나타났다. 산업화 세력의 가치라 할 수 있는 '성장론'에 대한 공감대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 수치로 비교할 수만은 없다. 우리 경제의 문제점이 '양극화를 해소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응답이 62.2%로, '성장을 못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응답 31.4%의 배에 달했다. 경제성장을 통해 경기를 회복하고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데 동감하면서도 빈부 격차의 문제점 또한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문제와 관련, 차기 대선에서는 두 갈래의 여론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는 동안 경제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한국이 이류.삼류 국가로 전락하는 데 대한 분노가 거대한 흐름으로 표출되는 게 첫 번째다. 만약 경제의 거시지표가 호전되는데도 서민의 고통이 지속된다면 사회경제 시스템에 대한 불만, 즉 분배의 요구가 커지는 흐름이 나타나는 게 두 번째다.

현재 여론지표상에서는 두 가지 흐름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으며 다음 대선까지 어느 쪽 흐름이 더 커지느냐에 따라 차기 대선에서 또 다른 핵심 변수가 될 수 있다.

[차기 대선 어떻게 읽나] 그동안은 인물.이슈 중심 경제정책 주요 쟁점 될 수도

그동안 한국 선거는 크게 봐서 인물과 이슈의 선거라는 측면이 강했다. 정치 선진국과는 달리 정책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우리 선거를 분석해 보면 정치 이슈가 선거 전반의 흐름을 결정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차기 대선에서는 경제가 핵심 어젠다로 부각될 것이라는 예상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다만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경제가 점차 핵심 정치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난 15대 대선 때 경제파탄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호남과 충청권의 지역연합을 모색한 DJP연합, 부산경남에서의 이인제 후보를 중심으로 한 표 분산 효과,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의혹 등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던 김대중 후보는 2%포인트가 채 안 되는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어 16대 대선에서도 '경기 침체'가 상당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이는 그동안 '성장중심주의' 선상에서 경제정책을 유지해 온 여야가 경제정책에서 차별화를 하기 힘들었고, 우리 정치가 인물에 대한 평가나 '산업화 대 민주화'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정치적 이슈를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어느 정도 충족됐다. 또 경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불안이 누적돼 있다. 경제정책으로 차별화하기는 어렵다 해도 성장과 분배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는지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빈부 격차를 줄여나가는 데 역점을 둬야 하는가, 다시 본격적 성장정책을 추진해나가야 할 시점인가. 역대 대선보다는 경제문제가 중심에 서는 대선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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