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육사졸업생들(117)장창국|반란의 경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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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구 6연대폭동 당시 연대헌병대장은 3기생 김진위대위(강원명주·예비역소장)였다.
마침 연대정보주임 신철대위(일명 신헌)가 연대장 김종갑소령을따라 여순반란 진압차출동하고 없어 김대위가 정보주임직무를 겸무하게됐다.
48년11월2일이었다.
당시 헌병대는 대구시내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정보과 선임하사인 일등상사 이정택이 새로 상관이된 김진위대위에게와서 정보보고를 하면서 연대인사계인 특무상사 곽종진이 6연대 좌익조직책이라고 말했다.
김대위는 즉시 보좌관인 조장필소위(6기)에게 곽종진을 연행해 오라고 지시했다.
조소위가 준비를 갖춰 지프로 연대본부를 향해 떠나려 할 때 이정택이 동승했다.
낮12시쯤 연대에 도착해보니 병기고 밖에서는 병사들이 기관총·박격포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출동나간 부대에 보낼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조소위는 인사과로 가서 곽종진을 불러내 헌병대까지 가자고 했다. 곽상사는 모자를 쓰고 나오겠다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조소위와 이정택은 지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후 곽이 지프앞에 다가와 야전점퍼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조소위의 이마를 쏘아 즉사케했다.
조소위가 쓰러지자 이정택은『여순반란군이 대구에 들어왔다』고 외치면서 연대병력을 탄약고에 집결시켜 무장시켰다. 연대안에 있던 장교수명은 사살되거나 도망했다. 이래서 6연대는 좌익 하사관들에의해 장악됐다.
이정택은 잠시후 헌병대로 가서 김진위대위에게 조소위 피살사실을 보고했다.
부연대장 최경만소령은 단신 헌병대로 피신해왔다.
최소령과 김대위는 의논 끝에 인근에 있던 미군부대로 가서 함께 연대를 진압하자고했다.
미군측은 출동은 불가능하고 부대내에서 지원하겠다고했다.,
김대위는 현병40여명을 지휘하여 연대본부로 갔으나 반란군들은 기관총과 박격포로 반격해왔다.
그때 헌병 6명이 전사했다.
반군들이 차를 몰고 시내로 나오자 미군부대에서 기관총을 쏘아 타이어를 터뜨렸다.
차가 움직이지 못하자 반란 사병들은 도보로 시내로 나갔다가 분산되는 바람에 피살되거나 체포되고 주민은 팔공산으로 도피했다.
헌병대에 나와있던 이정택은 반군을 규합하여 칠곡·동명·양산의 경찰서등을 공격하고 지방좌익계들을 몰고 역시 팔공산으로갔다. 이것이 6연대의 제1차반란이다.
이정택은 당초 곽상사와 미리 짜고 헌병대에 제보하여 반란의 구실을 만들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조사결과 좌익조직은 연대내의 모든 부대에 침투해 있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지리산방면에 출동중인 제1대대 2개중대에 원대복귀명령을 내리면서 대대장 차갑준대위에게 대구에도착하기전에 사병들의 실탄을 모두 회수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원대북귀되면 처벌 될 것을 눈치챈 좌익하사관들이 대원들을 선동하여 실탄반납을 거부했다. 차대위는 탄약회수가 불가능하니 연대본부가와서 회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연대본부는 대다수가 팔공산으로 갔거나 체포되어 보낼만한 병력이 없었다.
48년12월6일 제1대대가 l7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월성군의 성당지에 이르렀을 때 대대인사계 이동백상사의 주당으로 반란을 일으켜 장교9명을 사살하고 주변일대의 지서를 습격하면서 역시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제2차반란이다.
팔공산에 들어간 곽종진과 이정효은 49년1월30일 포항기지 경비를 위해 배치된 제4중대의 제무계 선임하사를 선동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좌익하사관들은 장교를 살해하고 부대를 장악, 시내로 진격하려 했으나 사병들이 응하지않아 실패했다. 이것이 제3차 반란이다.
팔공산에 집결했던 반란군의 주력은 태백산으로 이동하여 산간주민들을 납치해다 대원으로 훈련시켜 2백여명으로 부대를 형성, 게릴라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이성가대령)예하에 배속됐던 10연대 5중대(중대장 박치옥중위)의 기습공격을받고'완전히 궤멸됐다.
박치옥중위는 60여명을 이끌고 공비를 추적하던 끝에 2백여공비가 집결해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접근해 보았더니 지휘관은 이정택이었는데 그때 여자와 함깨 있었다고한다.
공비들은 한쪽에선 밥을짓고 한쪽에선 지도를 보며 숙의하고 있었다. 숫적으로 열세한 박치옥중대는 이를 근접포위하여 집중사격으로 기습, 1백60여명을 사살하고 30여명을 생포했다.
5기생으로5·16때 공수단장으로 서울을 장악하는데 크게 기여했던 박치옥중위(대령예편·황주태생·58세)는6연대 창설요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사살된 공비중엔 낯익은 자들도많았다.
이정석은 그때 사살됐으나 곽종진의 행방은 알수없었다.
박치옥중위는 대위로 1계급 특진됐으나『전부대 진급이 아니면 사양하겠다』고 고집하여 본부에 대기하고 있던 중대원들까지 한계급씩 특진됐다. 대구 6연대 반란을 끝으로 그후 6·25까지는 이렇다 할 군내 좌익계의 저항은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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