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선 후퇴 선언한독일 피셔 외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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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녹색당의 간판스타인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이 20일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과격 혁명 투사·택시기사·부총리 겸 외무장관·마라톤맨 등 다양한 얼굴로 변신해 온 피셔의 퇴진으로 녹색당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됐다. [베를린 로이터=뉴시스]

"나의 시대는 끝났다."

20일 오후 2시38분(현지시간) 독일연방 하원에 위치한 녹색당 의원총회장은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의 간판 스타 요슈카 피셔(57) 외무장관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큰 짐을 벗어던진 것 같다. 20여 년 전 나는 정치권력과 개인의 자유를 맞바꿨다. 이제 나 자신의 자유를 다시 찾고 싶다."

피셔의 고별사가 끝나자마자 동료 의원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갈채를 보냈다. 거인의 퇴장을 아쉬워하며 새로운 앞날을 축복하는 기립박수는 6분간 이어졌다. 유럽대륙을 휩쓸었던 1968년 학생운동에 앞장섰던 거리의 투사, 그리고 공장노동자.택시운전사를 거쳐 부총리 겸 외무장관에 오른 오뚝이 인생. 이제 화려했던 정치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게 됐다.

독일 정치인 가운데 피셔만큼 화제를 많이 뿌린 인물도 드물다. 반미와 독자 외교의 선봉에서 팝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불규칙한 식사와 스트레스로 112kg까지 불어난 몸매를 97년 마라톤을 시작해 35kg이나 뺐다. 그가 마라톤에 대해 쓴 책 '나는 달린다'는 우리나라 마라톤 열풍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아무도 그의 퇴진을 예상하지 못했다. '녹색당=피셔'였기에 아무도 그가 없는 녹색당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피셔는 현재 당이나 하원에서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사실 상의 당 최고지도자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녹색당은 당직과 공직의 겸임을 제한하고 있다. 피셔는 이 때문에 98년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면서 원내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번에 녹색당이 야당이 되면 피셔가 다시 원내의장직에 복귀할 것으로 당원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과 원내 지도부 선출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지금은 전환점이며 당과 의회 지도부에는 더 젊은 세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분간 하원의원직은 유지키로 했다.

녹색당은 총선에서 8.1% 득표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원내 꼴찌인 제5당으로 밀려났다. 연정을 구성해왔던 사민당과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해 당의 진로가 불투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녹색당이 여당이 되려면 색깔과 정책이 다른 보수 야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자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이 그러한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피셔 장관은 "보수 야당과는 정체성이 너무 다르다"며 완강히 거부해왔다. 문제는 녹색당의 선택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피셔는 자신이 연정협상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엉뚱하게도 피셔의 이날 폭탄선언으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유탄을 맞게 생겼다. 슈뢰더와 보조를 맞춰온 피셔가 사라진 이후 녹색당이 방향을 틀게 되면 사민당이 꿈꿔온 3기 집권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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