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금주 계획 작심삼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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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형경
소설가

지인 남성의 유럽 여행길 일화를 귀동냥한 일이 있다. 그들 일행이 독일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 술을 주문하면서 “알코올 도수가 더 높은 술은 없는가”라고 거듭 물었더니 식당 주인이 되물었다. “당신들 한국 사람이냐?” 그 이야기 역시 술자리에서 나왔고, 주량을 자랑하는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처럼 그 말투에도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술 잘 마시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비음주자로 사는 열등감 때문에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다.

 새해 목표를 세우는 시기다. 성인 남자들의 새해 목표는 금주·금연이 첫째일 것이다. 목표를 세우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짐작한다. 오죽하면 작심삼일을 넘기기 위해 삼일마다 새롭게 목표를 세우자는 우스개까지 있겠는가. 술이나 담배를 끊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단지 술·담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음주나 흡연은 마음 깊은 곳의 불안, 수치심, 공허감 등과 관련되어 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순간 우리는 내면의 불안이 가라앉고 공허감이 잠시 충족된 듯 느낀다. 도박, 섹스, 속도감 등 우리가 의존하는 중독 대상들은 모두 동일한 심리적 용도로 사용된다.

 미국 심리학자 존 브래드쇼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임을 인정하고 ‘12단계 프로그램’에 따라 술을 끊었다. 하지만 단지 술만 끊었을 뿐이었다고 회고한다.

 “비록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심하게 강박적이었고 그런 성향으로 인해 삶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강박적으로 일하고 구매하고 흡연했다. 하루 열두 잔의 커피를 마셨고, 흥분과 재미를 주는 속도감에 몰입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중독 성격을 다시 치료받기 시작했다.”

 강박적 의존 성격을 치료받으며 존 브래드쇼가 알아차린 사실은 자신이 겪는 심리적 문제들이 알코올 중독 가정에서 자란 성인들의 공통된 심리 특성이라는 것이었다. 흥분 중독, 지나친 책임감, 친밀감의 오류, 인정 욕구, 자기비하 등등. 사실 금주·금연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그것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독 성향이 인성의 일부가 되어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며, 유산이기에 소중히 여기고 싶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 부모의 자녀 중 술을 못하는 이들은 단맛에 중독되기 쉽다. 알코올과 설탕의 분자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술을 권하고, 주량을 자랑하고, 취중 잘못에 대해 서로 관대한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그런 유산을 물려받은 걸까 생각해보게 된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