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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능성 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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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능성 구씨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무신가문으로 꼽혔다.
세조때부터 21대 영조까지 3백여년간 많은 장신과 공신을 배출했고 중종·인조반정등에 직·간접으로 활약, 권력의 핵심에서 조선조의 정치·사회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75년 국세조사에서 남한의 능성 구씨는 2만6천9백61가구13만여명. 성별인구순위 37위를 기록했다. 전체인구에 대한 비율은 0.4%.
45%가 영남지방에 집중돼 있고 20%가 서울·경기지방에 사는 특징을 인다.
시조는 고려때 삼조삼중대광검교상 장군을 지낸 벽상공신 구존유.
그의 선대는 분명치 않은데「동사보유」와「주청계공실기」에 따르면 신안주씨의 시조 주잠의 사위로만 기록되어있다. 전남 능성현(현 능주면 고정리)에 은거하던 주잠은 1남1녀를 두었는데 딸이 구존유에게 출가, 능성에 살게 되면서 능성 구씨 가 비롯됐다는 것.
글 이석구
사진 김택현
능성 구씨는 고려말∼조선초 시조의 6대손때부터 10개파로 갈렸다.
판사(시조 현좌) 시랑중(영량)·좌정승(홍)·판안동(성량) 도원사(성로) 재신(성덕)·낭장(현보)·감무(현기)·팜판(성미)·문천군사(원립)파등이다.
그중 좌정승·판안동·도원사파가 구씨 전체인구의 80%를 차지할 만큼 가장 번창하며 특히 전체인구의 40%나되는 도원사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좌정승·판안동·도원사·재신파의 시조는 홍·성량·성로·성덕등 4형제. 이들 형제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큰 활약을 했고 이때부터 능성 구씨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세조때 구치관이 영의정에 올랐고 중종·인조 두차례 반정에 모두 공신으로 가담해 더욱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
능성 구씨·대종회에 따르면 능성 구씨는 조선조때 5백62명의 과거급제자를 냈다. 상신2명·왕비l명·부마4명·공신10명·장신(등단대장) 10명·판서12명.
그중 진사 1백44명·문과 55명·무과 3백63명으로 문·무가 함께 있으나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 1명도 없는 반면 무과는 65%나 돼「무신집안」이라는 칭호를 받게됐다.
파별로는 도원사파 3백59명, 판안동파 72명, 좌정승파 42명으로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숱한 현직을 낸 능성 구씨들이 또달리 절개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선조는 좌정승파 시조 구홍과 구인문.
구홍은 두문동 72현으로 고려 우왕때 좌시중(부수상)을 지내고 조선개국때는 이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죽었다.
그는 죽을 때 이태조가 내린 좌의정이란 조선관함을 쓰지말라고 후손에게 유언까지 했다. 그러나『자손들이 왕명을 어기기 어려워 명정(상여앞의 깃발)에 좌의정이란 관직명을 썼다고 한다. 그러자 출상때 돌풍이 불면서 깃발이 찢어졌다. 후손들이 고려때 관직 좌시중을 썼더니 바람이 잦다는 것이다.
일제때는 구여순·구연영등이 항일운동가로 조국광복에 앞장섰다.
구여순은 24세때 3·l독립운동으로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뒤 22년 상해로 망명했다.

<절개의 상징 구홍>
23년봄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표자대회에서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과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않자 무력투쟁의 기치를 내건 의열단에 가입, 광복을 위해 싸웠다. 구여순은 의열단에서 강홍렬등 5명과 함께 조선척식회사·조선은행·종로경찰서 폭파등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4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구연영은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기독교에 귀의, 전도사로서 청년운동에 앞장서 민족계몽활동을 했다. 국채보상운동·일진회 규탄·배일운동등을 외치며 활동하다 아들정서와 함께 체포돼 l907년 총살당했다. 해방후 63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능성 구씨 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은 구인회(69년작고)전 럭키 그룹회장집안.
구인회는 도원사파로 시조 구존유의 26세손.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회인「구인상회」를 경영하다 47년1월 부산에서 락희화학공업을 설립, 오늘의 럭키 금성그룹을 이루었다.
구인회는 락희산업(53년설립), 금성사(58년) ,한국케이블(62년), 호남정유(67년) 한국콘티넨탈·카본(68년) 금성통신(69년) 럭키개발(69년)등을 계속 설립, 대재벌로 키웠다.
포천지에 따르면 81년도 매출액기준으로 미국을 제외한 기업중 9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구인회는 6형제중 장남으로 69년 연암문화재단을 설립한 후 작고했지만 구태회(전 공화당의장·럭키 금성그룹고문), 구평회(호남정유사장), 구두회(금성반도체사장)등 형제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있다.
70년1월 유업을 이어받은 구자경 럭키 금성그룹회장(6남4녀중 장남)은 금성전기·희성산업·금성반도체등 9개회사를 새로 설립하는등 사세를 확립, 20개 자매회사를 거느린 총수로 활동하고 있다.

<구인회, 도원사파>
구자경회장 집안의 가훈은 구인회 전회장때부터 내려온「인화」. 회사경영에도 이를 적용, 운영하는 관계로 럭키 금성그룹이 가족 경영체제이지만 흔히 있는 후계자들간의 재산권 다용이 전혀 없는 것이 특색이다. 또 문중일에도 열심이다.
현재 능성 구씨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역시 실업계. 럭키그룹의 구봉조(옥동철광사장) 구연이(동해투자금융사장)등 전·현직 실업인이 수두룩하다.
구연철(이대교수)·구영회(미 오도바인대학장)·구연회(서울인교수)등 27명의 교수와 구본석(서울시교육감)등이 교육계에서 활약한다.
구상(시인)·구중서(문학평론가)등이 문학계에서, 구봉서(코미디언)·구민(성우)등이 연예계에서, 구박(KBS심의실장)·구종서(중앙일보출판국주간)가 언론계에서 활약하는 구씨가의 인재들.
이밖에 5·16혁명주체세력으로 서울시경국장·서울시장·내무장관을 지낸 구자춘을 비롯, 구태회(전국회부의장·공화당의장) 구범모(전서울대교수·국회의원)등이 관계·정계에서 한시대를 누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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