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⑩국제] 100. 메이드 인 더 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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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세워진 삼성전자의 옥외 광고판. <중앙포토>

▶ 구자경 금성사 회장(맨 오른쪽)이 1982년 10월 미국 헌츠빌 공장의 준공식 테이프를 끊고 있다.

“인도네시아 오지의 무한한 삼림자원을 개발해야 합니다. 위험하지만 한국의 군인정신이면 할 수 있어요.”

최계월(86)코데코 총회장. 일본군 학도병 출신인 그는 1960년대 초 인도네시아에서 ‘남방개발’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원목 수입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40대 초반의 패기를 앞세워 자원 확보에 고심하던 한국 정부를 설득했다. 68년 한국 정부는 당시로선 거액인 450만 달러의 투자를 승인했다. 해외 직접투자 1호였다.
최계월은 퇴역 해병대원들로 선발대를 구성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끝없이 펼쳐진 8억 평의 원시림, 풍토병과 독충, 무더위와 습기가 기다리고 있는 남부 칼리만탄주 ‘바투리친’이었다. 이후 코데코로 이름을 바꾼 남방개발은 유전ㆍ가스전 개발로 영역을 넓혔다. 최계월은 자원 개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과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한국 기업의 ‘글로벌화’는 해외 삼림 등 자원 개발로 시작됐다. 달러 한 푼, 원목 하나가 아쉬웠던 그 당시, 생존을 위해 해외로 나간 한국 기업에 ‘글로벌화’란 말 자체가 사치였다.
70년대 한국 기업의 세계 시장 공략은 중동의 열사(熱砂)바람 속에 이뤄졌다. 오일 달러를 잡으려고 건설업체들은 중동으로 매진했다. 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입찰한 현대건설은 10개 선진국 업체를 제치고 수주에 성공했다. 입찰팀 전원이 일주일간 씻지도 않고 합숙하며 전력을 기울인 성과였다. 당시 입찰금액은 9억3114만 달러(당시 환율로 4609억원).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맞먹는 돈이었다.

수출, 해외 건설 등으로 외화를 벌어들였던 한국 기업들은 80년대 ‘메이드 인 코리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메이드 인 더 월드’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무역수지 흑자 확대에 따른 원화 절상, 노동운동 열기, 인건비 상승 같은 요인과 선진국의 무역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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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초 금성사(현 LG전자) 회장실. 구자경 당시 회장은 고뇌에 찬 표정이었다.“반덤핑 제소 같은 무역장벽을 피하려면 이제 우리도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임원진의 건의에 구 회장은 “달러 한 푼이 귀한 때에 어떻게…”를 되뇌며 망설였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의 대세를 간파한 구 회장은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컬러TV 공장을 건설키로 결단했다. 100% 한국 민간기업 자본으로 투자된 최초의 해외 공장이었다. 당시 자본금은 450만 달러. 82년 10월 제1공장 준공식 당시 현지 언론은 “미국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한국이 미국에 공장을 지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금성사 헌츠빌 공장은 이후 제2 컬러TV 공장, 전자레인지 공장 등을 증설하며 발전하다가 한국산 부품 수입 규제 강화, 임금 상승 등의 악재를 피해 80년대 후반 멕시코로 옮겨갔다.
해외 투자를 주축으로 하는 한국 기업의 세계 경영은 90년대에 눈부시게 전개됐다. 특히 90년대 중반 유럽연합(EU)과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 등 세계 경제의 블록화 추세에 따라 간접수출형 투자가 많았다. 여기에다 냉전시대 종식은 새로운 찬스였다. 중국ㆍ소련ㆍ동유럽에 대한 진출은 폭발적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세계화’는 코흘리개까지 입에 올리는 화두였다.

한국 기업의 해외 투자건수는 지난해 3768건(수출입은행 집계). 68∼80년 사이에 352건이었던 데 비하면 그 열기가 느껴진다. 전 세계에 한국 자본으로 세워진 법인은 현재 2만3000여 개나 된다.
세계화 전략에 따라 인재 확보도 국경을 초월했다. 97년 삼성그룹은 10여 개 국적의 글로벌 전략가 25명으로 구성된 ‘미래전략그룹’을 만들었다. 이들은 디자인ㆍ컨설팅 등에서 세계화된 안목으로 비전을 짜는 업무를 맡고 있다. 삼성전자의 국내외 인력은 총 11만5000명 선. 그중 5만여 명이 외국인이다. LG그룹의 해외 인력(5만5000여 명)도 국내 인력(7만 명)과 큰 차이가 없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해외에서 매출액의 80%를 팔고 있다.

한국 기업의 브랜드 가치도 껑충 뛰어올랐다. 미국의 브랜드 컨설팅사인 인터브랜드가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100대 브랜드’명단엔 삼성(20위), 현대자동차(84위), LG(97위) 등 3개 사가 들어갔다. 특히 삼성은 올해 처음으로 ‘일본의 자존심’이라는 소니(28위)를 앞섰다. 99년까지 한국 기업이 단 한 곳도 들지 못한 데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삼성전자ㆍ포스코ㆍSK텔레콤 등의 신용등급은 국가 신용등급보다 1~2단계 앞선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세계화에는 숱한 시행착오가 불가피했다. 최대의 풍운아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글로벌 무대를 주름잡던 김 전 회장이 국제통화기금(IMF)이 들이댄 ‘글로벌 스탠더드’의 잣대에 쓰러진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내 업체들이 한국을 떠나는 바람에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작용도 생겼다. 제조업 관련 일자리는 최근 4년간 10만 개나 줄었다. 해외로 기업 근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기술 유출 논란도 적지않다.

한국 기업의 세계화는 한국 경제가 그랬듯 ‘압축 성장’의 역사다. 그 때문에 현지인, 현지문화와 부닥치며 종종 파열음을 일으킨다. 중국ㆍ동남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중간 관리자들이 강압적인 군대식 기업문화로 현지 근로자를 대하다 국가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이현상 기자

그때 중앙일보
한·인니 경협 본격화

1968년 1월 19일. 이날 2면엔 ‘한ㆍ인니 경협 본격화’란 톱 기사가 실렸다. 양측은 무역ㆍ산림ㆍ수산 분야의 협력을 확대키로 했다. 남방개발의 산림 개발을 지원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당시 한국의 경제력은 필리핀ㆍ태국에 뒤떨어져 있었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제2경제’란 단어를 써가면서 새마을운동과 같은 범국민적 운동의 구상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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