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자유당과 내각(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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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범석 내무의 등장, 5월24일의 비상계엄령 선포는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밀어붙이겠다는 신호였다.
때 맞춰 원의 구성을 끝낸 지방의회가 국회의원 소환 결의 등 국회규탄의 앞장에 섬으로써 행정권의 국회 억압에 민의라는 구실을 터주었다. 국회의 권능이 유린되고 정치가 압살되는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었다.

<군수뇌 중립고수>
계엄령이 발동되었지만 군대가 동원된 것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군의 동원을 지시했으나 군 수뇌부는 작전중인 군데를 부산으로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참모총장 이조찬 중장, 작전국장 이용문, 정보국장 김종면, 헌병감 심언봉 준장 등이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데 공헌한 사람들이다. 그 때 헌병대를 이끌고 정치파동의 주역으로 등장한 사람이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이다. 원 장군은 정치파동에 대비해 기용된 것은 아니었다.
이 대통령은 그 해 3월 진해 앞바다의 덕적도에 낚시질을 나갔다가 난데없는 수십 발의 총소리에 놀란 일이 있다. 조사해 봤더니 근처에 있던 미군들의 물새 사냥이었다. 대통령은 몹시 노해 미군일지라도 한국 헌병대에서 관계자를 체포해 조사 처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렇지만 상대가 미군이고 전쟁중이었으니 대통령의 뜻대로 처리될리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대통령은 난민촌 시찰을 나가다 수행중인 경무대경찰 이정석 서장에게 왜들 미국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느냐고 묻더니 불쑥 <장군중에서 뱃심좋은 사람이 누구야>라고 물었다. 이 서장은 대답을 못했다.
그 일이 있은 뒤 대통령은 여러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쌀값 폭등 때문에 불려들어 왔던 함인섭 농림장관도 그런 질문을 받았다. <아무래도 원용덕 장군아니겠읍니까> 그러자 대통령은 <오, 그렇지. 그 친구가 있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먼.>
그러더니 곧바로 원 장군을 불러들여 헌병 총사령관에 기용했다.
원 장군은 채병덕이 참모총장이 된 뒤 예편되었다가 함태영 심계원장이 주선해 현역에 복귀, 그 때는 조병창의 책임자라는 한직을 맡아 사실상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런 원 장군에게 뜻밖에 대통령의 부름이 있고 헌병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이 주어졌으니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일 기회를 잡는데 노심초사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5월 26일 원용덕의 헌병대가 국회에 대한 압력에 기선을 잡았다.
국회의원 50명을 태운 국회버스를 의사당 입구에서 억류한 것이다. 억류 상태가 오래 끌자 신익희 의장, 조봉암·김동성 두 부의장이 임시 관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때 대통령은 국회에 대한 불만을 직선적으로 털어놓았다.

<국회가 종래 해 온 일이 민의에 맞지 않은 것이 많을 뿐 아니라, 민중들로부터는 국회의 해산을 요구하는 결의문이 쇄도하고 있으니…나로서는 국회 해산은 안 할 것이나 국회라는 하늘을 쓰고 도리질을 하는, 아무 일이나 다 하는 줄 아는 것 같으나 그렇지 못한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국회의원이 사람을 죽였는데 내놓으라고 석방결의를 하는 일이 어디 있소>라고 했다.

<원용덕이 앞장서>
신 의장은 서민호 의원의 경우는 술취한 서 대위가 권총을 뽑아 쏜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그렇다 해서 국회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구속으로 조사하라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곤 당장의 문제인 국회버스 억류로 얘기를 돌렸다. 행정부의 국회에 대한 간섭은 국제적으로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니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나도 할말이 있어야 할 것인즉 또 들어가서 손을 들고 무슨 결의를 하지 않도록 의장이 잘 하시오.>

<국회는 정부와 달라 의장은 회의를 진행시키는 것뿐이고 결의는 다수결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의장이 하면 되오.>

<노력은 하겠읍니다만 우선 국회가 회의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러면 국회에서 종래 해 온 일이 민의를 물어보니 그렇지 않더라고 하는 의사표시를 하면 모든 잘 될 것 아니오.>

<그것도 회의를 해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알았소. 내가 명령을 내리리다.>
이런 정도로 국회 대표단을 물러나왔다. 그러나 국회버스는 석방대신 크레인으로 헌병대에 끌려갔다. 의장단은 관저에 연락했으나 대통령은 외출했다는 답변이었다.

<미군 정세 나돌아>
버스에 탔던 의원은 모두 조사를 받았고 그 중 4명은 풀려나지 못했다. 경찰도 행동을 게시해 국회의원 체포에 나섰다. 구속이유는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였다. 국회는 의원들이 구속되거나 피신해 회의가 성립되지 않았다. 국회의원 소환과 해산결의를 한 지방의원들은 부산으로 속속 올라와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데모도 벌였다. 의원들은 당시를 회고해 관제민의가 국회를 협박했다고 했다.
반면 그때 막 내무장관에서 물러났던 장석윤씨는 『국회해산 데모는 관제민의가 아니고, 대부분이 도·면 의원들이었다. 당시 이 박사를 싫어했던 「무초」미 대사도 데모조사를 하고 대부분이 도·면 의원들이라고 국무성에 보고했다』고 반론을 폈다.
그런 상반된 주장의 어느 것도 거짓은 아니다. 지방의회의 압력도 있었지만 대한청년단 행동부대들이 주도한 백골단·민중자결단 및 그전위부대인 땃벌떼가 등장하는 살벌한 계절이었다.
6월 4일 대통령은 국회에 다시 압력을 가했다. 『다소간 정치에 파문이 있는 것은 민주정치의 발전되는 과정으로 간주할 것이나 비밀분자들이 이북 공산당과 결탁하고 자금까지 받아가며 평화통일이라는 것을 획책하고 있는 마당이지만 나의 입장은 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했다는 전례를 남기고 싶지 않아 며칠 기다려 순리대로 처리되기를 기대한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국회를 향해서라기보다는 내외의 들끓는 여론을 겨냥한 듯 했다. 그때 국회는 의원들이 구속되거나 피신해 있어 마비 상태였다. 전쟁중의 정치 격동이어서 민심은 흔들렸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성명을 내고 참전국들도 정치불안에 우려를 표시했다. 미국 대사관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사태는 개선되지 않은 채 1개월을 끌었다. 국회해산설, 미군정실시설 등 온갖 풍문이 난무했다. 미군 개입설은 7월들어 파다하게 번졌다. 서범석 의원은 7월3일 석방되었는데 그때 어떤 청년은 조병옥 박사가 4일까지만 버티라고 말하더라면서 미 8군이 이 대통령을 감금하고 잠정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기로 했는데 D데이가 7월4일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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