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자유당과 내각(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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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정부는 국회가 제안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법정시한 마감날인 5윌7일 공고했다. 그러곤 14일 정부측 직선제개헌안을 다시 의결해 공고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의 재제출때 국무회의에선 논의가 분분했다. 한동석총무처장등 몇몇 각료는 국회의 개헌파와 연결된 내각책임제 개헌파였다. 그들은 통과도 안될 직선제 개헌안에 서명할수 없다고 반대했다. 14일 국무회의에서 찬·반토론이 한창일 때 이대통령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2개개헌안 대결>
『정부에서 개헌안을 확정하기 전에 내가 일러둘 말이 있읍니다. 이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 내 뜻이오. 이러한 내 뜻과 다른 사람은 모두 물러가도록하시오.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는 국무위원은 그만두도록 하라는 얘깁니다.』
대통령의 단호한 결의표시였다. 직선제개헌 반대파였던 한총무처장이 맨먼저 <각하 말씀이 옳습니다>고 했다. 의원겸직장관인 이교선상공·조주영체신장관이 직선제개헌안 내용을 설명했다. 조금전까지 반대하던 각료들도, 장택상총리도 아무 말을 안했다.
이상공이 결론을 내렸다.

<전 국무위원은 합심해서 개헌을 추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통령을 향한 서약이었고 그 자리서 개헌안에 연서해 바로 공고한 것이다. 이렇게해서 정국은 다시 두개의 개헌안 대결로 밀려갔다. 그 대결은 곧바로 원내와 원외 대결로 나타났다.
국회안 정파들의 순탄한 개헌행군에 반기를 올린 것은 지방의원선거에서 압승한 원외자유당이었다. 「내각책임제 개헌반대 전국정당사회단체 공동투쟁위원회」는 4월27일 드디어 선전포고를 했다.
『소수 자본가와 권세정당이 내각책임제라는 미명아래 정권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일대 음모를 감행하고 있는 공포적 사실을 일반국민에게 폭로하여 이음모를 분쇄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량한 이상주의자에 대해서는 성의를 다하여 포섭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포섭과 규탄이란 양면 전략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된 직후의 국회규탄과는 규모도 성격도 다른 투쟁의 선언이고 준비였다. 1월의 투쟁은 소규모였고 비조직적이었다 그때 이른바 백골단이 등장했지만 그것은 10인이 수행한「비라작전」일뿐이었다. 그 내막을 살펴본다.
직선제개헌안이 부결된 직후 대통령은 대한청년단의 문풍제부단장을 불러 들였다.
일본에 나가있던 문부단장은 그때 막 조직을 끝낸 재일 대한청년단장 조영주와 함께 귀국해 양우정의원과 함께 셋이서 임시관저로 들어갔다. 귀국보고가 끝나고 직선제개헌 문제에 얘기가 미치자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그런건 아니야. 국회의원 몇몇이 작당해서 부결시킨거야. 그 사람들이 그렇게 심하게 나올줄 몰랐어. 작당을 해도 유분수지 그럴수 있어… 문단장, 밖에서는 뭐라고들 해.><각하, 걱정마십시오. 많은 국민들들은 국회의 이번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그래…> 그날 대화는 그뿐이었다.

<백골단, 비라작전>
그 며칠후 양우정이 문·조 두사람을 불렀다. <우리가 이기회에 이박사를 도와야 하지않겠느냐. 청년단 간부중에서 비밀을 지킬 5∼6명만 골라라.> 양우정의 제안은 간단했다. 「지금 민국당에서 이박사를 비난하는 벽보들을 써붙이고 있는데 우리가 그 비라 위에다 개헌안을 부결시킨 국회의원을 규탄하는 벽보를 붙이자」-이같이 투쟁방법이 결정됐고 그 비라를 붙이는 단체이름을 놓고 이런저런 검토를 하다 조영주가 해골단본부라는 이름을 제안하고 양우정이 그보다는 백골단으로 하자고 해서 그 명칭도 정해졌다.
이렇게 해서 대한청년단의 행동요원 7명을 뽑은 10인이 부산 영도의 대평동에 비밀아지트를 마련해 낮에는 비라를 만들고 한밤중엔 그 비라를 거리에 붙였다. 비라의 내용, 그리고 백골단이라는 서명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듯했지만 최초의 출발과 행동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4월의 투쟁선언은 달랐다. 지방선거 압승의 여세를 탄 방대한 조직동원이었다. 최초의 행동은 전국각지에서 군단위로 벌이는 국회의원소환운동으로 나타났다.

<의원들 안넘어가>
소환운동은 「국회의원 환영 군민대회」 또는 「농업증산 군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소집됐다. 이 집회는 원외자유당의 외곽단체인 대한청년단이 주관했다. 안호상본부단장이 각지부 단장에게 보낸 비밀지령문은 이랬다.
군민대회에는 출신 국회의원을 참여시켜 이하의 요령으로 대회를 진행하라. ①정부제안의 직선제 개헌안에 가·부 그 어느쪽을 택했나 ②부표를 던진 의원에게 이유을 따지라 ③헌법개정은 중요문제인데 왜 군민의 뜻을 묻지않았나 ④독단적 행동에대해 사과하라 ⑤내각책임제 개헌에 서명했나 ⑥만약 찬성 서명을 했다면 이 자리에서 서명취소를 서약하라.
△사과하는 의원에 대해서는 앞으로 개헌등 중요문제는 군민의 의사를 청취한뒤 태도를 결정짓겠다는 서약서를 쓰거나 군민앞에 공개서약을 하도록 하라 △사과치 않는 의원에게는 즉시 불신임 결의를 하는 동시에 보궐선거 실시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 △내각제 찬성의원이 서명취소를 약속하면 그 사실을 성명서로 작성, 신문에 발표하도록 하라 △내각제 찬성을 철회한 의원에 대해서는 군민의 계속적인 지지를 확인하는 비라와 포스터를 붙이라 △끝내 군민대회의 요구를 거부하는 의원에 대해서는 군민이 반대하는 개헌안을 지지하는 자이므로 불신임한다는 비라와 포스터전을 전개하라.
민국당의 김양수(순천) 박충식(공주), 원내자유당의 오위영(울산) 엄상섭(광양) 윤길중(원주)의원등이 환영대회에 초청된 1번 타자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원들이 대회에 나가지 않아 청년단 중앙본부의 각본은 연출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대회를 통해 번외의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렇다 해서 군민대회가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국회에 대한 압력의 명분이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제2단계 투쟁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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