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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태, 강 건너 불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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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김수봉
보험개발원장

러시아 금융시장이 심상찮다. 유가 하락과 더불어 석유 수출에 크게 의존해 왔던 러시아의 루블화 가치가 절반 수준으로 폭락하면서 러시아의 국가부도설까지 나온다. 러시아 정부는 기준금리를 10.5%에서 17%로 대폭 올렸고 국민은 물건 사재기에 나섰다고 한다. 베네수엘라 같은 산유국이나 인도네시아, 인도와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외환이 빠져나가면서 저유가로 인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재연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정부와 금융감독당국은 국제금융시장 혼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다.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이 저유가판 서브프라임 사태로 이어지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개발도상국들이 외환보유고를 늘렸고 아시아 국가끼리 통화스와프(맞교환) 협약을 체결하는 등 상호 협조 체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전과 달리 펀더멘털이 강해 금융시장 혼란은 미미한 상황이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저유가가 장기화되면 체력이 약한 개발도상국에 그 영향이 전이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계부채 규모가 1000조원을 훌쩍 넘어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위기가 전이돼 금리가 오르게 되면 가계와 금융시장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외환위기나 금융위기라는 단어는 트라우마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우리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정부, 기업, 국민도 이번 러시아 금융위기 사태를 계기로 전반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위기관리 시스템의 한 예로 금융회사의 시나리오 분석, ‘스트레스 테스트’를 들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감독당국은 위험관리 시스템을 대폭 보강토록 했다. 금융회사는 IMF 외환위기, 9·11 테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사건이 재발하더라도 예금이나 보험금을 지급하는데 문제가 없는지 체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금리 30% 상승, 주가 40% 하락, 환율 50% 상승, 부도율 100% 상승 등이 동시에 발생하더라도 재무건전성에 문제가 없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 놓는 것이다. 또한 경제·금융 환경에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를 상정해 수시로 위기상황을 분석하고, 단계별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나리오 분석과 스트레스 테스트는 기업에게 위험과 기회를 평가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발생 가능한 대내·외 환경 변화, 그 영향의 평가, 긴급 대응책과 손실 축소 전략에 이르는 준비가 미리 돼 있으면 기업이 당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분석 과정에서 자신의 비즈니스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는 부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위기관리 시스템이 포괄하는 범위는 금융이나 경제에 그치지 않는다. 임직원의 잘못된 행동으로 기업이 입을 수 있는 손실을 막는 것도 포함된다. 이를 운영 리스크라고 한다. 최근 불거진 일명 ‘땅콩 회항’ 사건처럼 잘못된 행동과 사후 처리 미숙으로 회사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고 경제적 손실까지 초래된 것이 하나의 예다. 이런 문제를 방지할 사전·사후적 위기관리 체계가 없었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와 기업 모두 위기관리 시스템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비단 러시아 금융위기의 파급 가능성이나 회사 임직원의 잘못된 행동으로 범위를 한정 짓지 말고, 이번 기회에 전반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을 점검해 볼 것을 제안한다. 위기관리 매뉴얼과 분석시스템이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지 변화한 환경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위기관리를 강조하다 보니 혹여 너무 소극적인 행동을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받을까 우려된다. ‘Hope for the best but prepare for the worst’. 어떤 일의 결과에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되, 최악의 상황에 항상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쩌면 모순이 될 수 있지만 진취적 기업가 정신과 최악을 대비하는 위기관리 능력이 균형을 이뤄 활력 있는 경제가 되길 기대해 본다.

김수봉 보험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