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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꿈의 실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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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두 주일 전, 압록강을 따라 북상했다. 마치 못난 조선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넌 백 년 전 이주민을 맞듯 북간도가 나를 맞았다. 만주 대륙 초입에 놓인 북간도는 조선 이주민의 꿈을 묻은 채 길게 누워 있었다. 북간도 명동, 넓게 펼쳐진 능선 사이로 윤동주 생가가 홀로 나타났다. 황량한 벌판에 길을 내듯 실개천이 반짝였다. 저 멀리 산비탈엔 삼나무 숲이 흘러내렸다. 50년 전 저곳엔 한족(漢族)들이 살았다고 생가를 지켜온 육십 줄 조선족 여인이 말했다. 그 이전 50년은? 내가 묻자 여인은 먼 곳을 응시했다. “여기 서풍이 엄청 매몰차요.”

 바람이었을까, 청년 시인의 꿈을 이 시대로 실어 보낸 것은. 70년이 지나도 가슴을 뜯는 민족 이산의 비통함이 속절없이 시든 이 시대의 머리채를 흔들고 있는 것은. 생가 문을 나서는 나의 뒤통수를 바람이 후려쳤다. 매몰찬 서풍은 홀로 선 청년을 황홀한 꿈의 세계로 안내한 망명 정부의 호출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계였다. 구릉을 뒤덮은 저 끝없는 하늘, 밤에 돋는 별, 그리고 깨어 있는 시간의 방황을 부추기던 바람, 그것이 망명 정부가 지정한 청년 윤동주의 운명이었다. 그 운명의 포박을 풀어 헤쳐야 한다는 각오, 그것이 꿈이었고 시였다. 나라 잃은 좌절의 시간에도 ‘하늘과 바람과 별’을 결국 ‘시’로 결정(結晶)시킨 역사의 혼은 꿈이었던 것이다. 조선 이주민을 바람 찬 만주 벌판에 백 년 넘도록 생존하게 만든 원기, 고난을 뚫고 대한민국을 지금껏 지켜온 불꽃이었다.

 귀국 길, 대한민국에 묻는다, 꿈은 있는가? 올해 직장에서 퇴출된 백만 명의 베이비부머들은 산업화 시대의 역군이 되어가던 1970년대의 꿈을 상기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을 것이다. 직장을 찾지 못해 자신을 헐뜯고 있는 수십만 명의 청년들에겐 저 현란한 도시의 네온사인이 두렵기만 하다. 직장인인들 어디 마음이 놓이랴. 지난주 종영된 인기 드라마 ‘미생’의 인간미 넘치는 상사 오 과장을 만나는 것은 천운이고, 혹 승진 경쟁을 뚫더라도 평균 백 대 일의 임원 등극은 아예 접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경제부총리를 경질해 묘수를 써봐도 얼어붙은 경기가 살아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매년 20만 명이 새로 진입하고 10만 명이 폐업하는 자영 업계는 이미 퇴직자를 탕진시키는 블랙홀로 정평이 난 터. 택시기사, 트럭기사, 택배기사들이 즐겁게 가로수를 누비던 시절은 끝났다.

 지배층은 이미 만원이다. 개천에서 용 난 무용담은 단군시대의 얘기가 됐고, 아무리 좋은 학력을 자랑해도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대체로 폐쇄됐다. 피케티(Piketty)의 주장처럼 21세기 저성장 시대엔 상속자본이 위력을 발휘할 터. 한국 자본주의도 상층 계급의 자녀들에게만 이미 지배클럽 회원증을 발행했다면 저 장그래 같은 비정규직 사원의 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입시지옥에 갇힌 필부·필녀의 자녀들에게 꿈을 꾸라고 누가 명령하는가?

 2014년 한국은 속울음 가시지 않은 사람들로 붐볐다. 분노와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감전된 공범의식은 아직 속죄할 방법을 찾지 못해 맴도는데 국가가 거둬간 치죄 권한은 결국 사법기구로 귀속되었다. 좌절에서 꿈을 건져내는 전화위복의 연금술이 정치라고 한다면, 2014년 정치는 사법과 치안기구가 도맡았고 법치주의가 민주주의를 비웃는 듯 맹위를 떨쳤다. 방산·원전 비리 같은 유착성 부패가 판을 치는데 어찌하랴. 시민들이 꿈을 잃고 상식을 등진 탓이다. 겉과 속이 다른 종북이 여전히 맹독성인 걸 어찌하랴. 유권자를 속이고 역사 전복을 꾀한 탓이다.

 상식이 퇴락한 무질서를 치유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정치와 법치. 정치는 소통 회로를 뚫고 꿈의 대화를 격려하는 신뢰 회복의 예술, 법치는 그것이 어려울 때 행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런데 ‘법치의 극대화’에 정치가 파묻힌 한 해였다. 질서는 잡히겠으나 미궁의 자기 검열을 지시하는 법치의 암묵적 시그널 앞에서 선남선녀들은 자발성을 접고 한없이 위축된다.

 2014년을 마감하는 이때, 다시 묻고 싶다. 우리에게 꿈이 있는가, 아니 꿈을 꿀 수 있는가? 청년시인 윤동주가 잔혹한 고문을 견뎌낸 불굴의 힘은 ‘하늘과 바람과 별’이 합주하는 조국의 대장정을 향한 간절한 소망, 꿈에서 나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죽더라도 꿈을 훼손할 수 없다는 이 비장한 각성은 정말 고통스럽게 일으켜 세운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속절없이 무기력해지는 후손들의 머리채를 흔들고 있는가. 일벌백계로 무장한 정치에 오그라든다면 대체 어디서 꿈의 부활을 기대해야 하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