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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무원이 되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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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
중앙SUNDAY
편집국장 대리

“장하다 ○○○, 행정고시 합격!” 얼마 전 농촌 마을 어귀에서 본 플래카드다. “아직도 이런 걸…”하며 지나치려는 순간 밑에 쓰인 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다. “사랑하는 외삼촌·외숙모가.” 아니, 외가까지? 뭔가 사연이 있겠다 싶었다. 행정고시는 2011년부터 ‘5급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하지만 세간에선 여전히 행시로 불리며 출세의 등용문(登龍門)으로 인식되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의 이화여고 교문에도 한 달 넘게 “경축, 2007년 졸업생 ○○○ 제56회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정동 길을 걸을 때마다 ‘외삼촌·외숙모 플래카드’가 오버랩되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가문·고향·학교가 ‘용이 되는 출세의 문(龍門)’에 들어섰다며 자랑하는데, 과연 인재들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있을까.

 사실 공무원 시험이라는 ‘급류’를 헤치고 용문에 오르려면 살인적인 경쟁을 해야 한다. 9·7·5급 구분이 없다. 올해 서울시 9급 보건직의 경우 10명을 뽑는 데 2588명(합격률 0.38%)이 몰렸다. 전국의 지방직 7급은 205명 선발에 2만6000명(합격률 0.78%)이 응시했다. 행시로 불리는 5급 공채는 1만103명이 경쟁해 3%(309명)가 합격했다. 젊은이들은 왜 이처럼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열광할까. ①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복(公僕)이 되려고, ②일이 덜 고되고, 안정적이고, 연금이 보장돼서. ①, ②번 중 어느 게 솔직한 답변일까. 한국경제연구원이 올해 전국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한 ‘국민 의식 조사’ 결과로 판단해보자. 직업 선호도 1위는 공무원이었는데 43%가 희망했다. 지난해보다 9%포인트나 치솟았다. 공무원의 삶의 질 만족도는 76%로 가장 높았다. 의사·변호사는 69%, 국민 평균은 57%였다.

 선망의 직업이긴 하지만 공무원들은 갑오년(甲午年)에 욕을 참 많이 먹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해경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무사안일·무책임·오만함이 또다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검찰은 더 심했다. 유병언 꽁무니만 쫓는 로봇 수사로 ‘헛똑똑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관피아들의 민간 유착관계와 먹이사슬이 드러났고, 땅콩 회항 때는 현직 공무원의 부적절한 처신이 공분을 샀다. 공무원연금 문제는 국민의 시선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연금 개혁에 저항하는 공무원에 대해 ‘세금을 갉아먹는 공공의 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정윤회 문건’ 파문은 공무원들의 입신 출세에 대한 생각을 곱씹게 만들었다. 이른바 십상시(十常侍)·문고리·찌라시가 도대체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잘못 둔 부하 하나가 조직 전체를 말아먹을 수도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파문의 원인 중 하나는 ‘수첩 인사’에 집착해 우수 인재를 못 찾고 있는 대통령이 제공했다. 인재 등용에는 보수·진보 구분이 없어야 한다.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인사를 비난할 국민도 없다. 갈 길 먼 대통령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는 대한민국의 세밑이 안타깝다.

 공무원들의 고충도 적지는 않다. 엊그제 만난 중앙부처의 고위 간부는 “공직사회의 분위기와 사기가 너무 가라앉았다”고 했다. “연금 깎이지, 민간에 가기 어렵지, 국민 시선 따갑지”라는 자조 섞인 3재(三災)론이 돈다는 것이다. 그래도 공무원은 민간만큼 삶이 팍팍하고 생존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간 숱한 경제난 속에서도 한 번이라도 월급이 밀렸거나 구조조정의 칼을 맞아본 적이 있는가. 국민이 나라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세금을 꼬박꼬박 낸 덕분이다.

 세금을 먹고사는 공무원은 나라의 기둥이다. 공무원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올해 5급 공무원 공채시험의 일반행정직렬 수석 합격자인 윤보라(25)씨는 “직업 안정성보다는 공직에서 봉사하며 일한다는 사실 자체에 큰 매력을 느껴 도전했다”고 했다. 앞서 언급한 ①, ②번 중 ①번인데 윤씨의 예쁜 마음이 진심이길 바란다. 107만 공무원들이 그런 초심을 가졌었다면, 아니 다시 가진다면 국민의 믿음도 커질 것이다. 이틀 뒤면 을미년(乙未年) 아침이 밝는다. 공무원들이 힘차게 일해야 나라가 활기차게 돌아간다. 다 함께 뛰어야 할 새해다.

양영유 중앙SUNDAY 편집국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