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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여자를 여성으로 … 한 글자 바꾸려 입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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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일구
강일구 기자 중앙일보 일러스트레이터
천권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일러스트=강일구]
천권필
정치국제부문 기자

최근 한 달(11월 27일~12월 26일)간 국회에서 발의된 의원입법안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봤다. 모두 508건이었다. 올 1~11월까지의 평균(309건)보다 200건 가까이 많았다. 국회는 29일 마지막 본회의를 끝으로 2014년을 마무리한다. 올해가 끝나기 전 조금이라도 ‘실적’을 올리겠다고 너도나도 법안을 내놓는 걸 뭐라 할 순 없다. 하지만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양승조 의원은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이사장’으로 변경하기 위한 법안이다. 다른 조항은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오로지 명칭 하나 바꾸기 위해 제출한 개정안이다.

 새누리당 이군현 의원도 ‘유아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로 제출했다.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개정안과 다르지 않다. ‘유치원’이란 명칭을 ‘유아학교’로 바꾸는 게 고작이다. 새정치연합 조정식 의원은 ‘여자’라는 표현을 ‘여성’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법률안(민법 개정안 등)을 한꺼번에 7개나 발의했다. 연말 의원입법안 508개 가운데는 이렇게 단순 자구 수정에 그치는 법안이 수두룩하다.

 실현이 되든 말든 일단 툭 던져놓고 보자는 식의 법안도 눈에 띈다. 어떤 의원은 모든 병사에게 전역 지원금을 300만원씩 지급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지난 10일 발의했다가 비판만 받았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9대 국회가 개원한 이후 지난 28일까지 제출된 의원 발의 법률안은 1만1851건이다. 15대 국회(1144건)의 10배다.

 하지만 법안 통과율을 따져보면 늘어난 의원입법안의 질을 알 수 있다. 19대 국회 의원입법안의 가결률은 10.8%다. 정부 입법안 가결률(30.4%)의 3분의 1 수준이다. 그나마 정부가 여당 의원의 이름을 빌려 내는 청부 입법안이 상당수라 순수한 의원입법안은 한 자릿수로 봐야 한다. 의원들이 내는 법안 중 열에 아홉 이상은 폐기처분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원들은 지역구에 가면 “나는 ○○법안을 대표발의했다”고 자랑스럽게 실적으로 소개하고 있을 것이다.

 의정 활동을 ‘정량평가’하다 보니 벌어진 현상이다. 국회 사무처는 해마다 입법 우수의원을 선정한다. 그 기준 중 하나가 바로 법안 발의건수다.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려면 이젠 의원 평가 방식부터 제대로 바뀌어야 한다. 법안 내용이 국민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했는지, 법안을 발의하기 전에 정책 공청회는 충분히 거쳤는지 질을 따져봐야 한다. ‘총재’를 ‘이사장’으로, ‘여자’를 ‘여성’으로 고쳤다고 실적으로 쳐줄 순 없다.

글=천권필 정치국제부문 기자
일러스트=강일구